고구려 668년에 멸망하고 그 뒤로 250년 뒤에 918년에 고려가 건국된다. 고구려와 고려사이에는 250년이라는 시간차가 있다. 그러나 조선은 5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외침을 겪었던 반면 고려는 존속 기간 내내 외침에 시달렸다. 993년~1019년 고려 거란 전쟁이 약 30년, 1107년 윤관의 여진정벌이 있었으며 다시 100년 뒤에 1231년~1259년 몽골의 침입이 이어졌다. 마지막 14세기 후반 공민왕 때는 위에서는 홍건적의 침입, 바다에서는 왜구의 출몰이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고려의 무기 체계와 전쟁기술이 발달되어 있었다.
서희와 거란의 소손녕이 담판
993년 거란 고려 침략이 시작된다. 옛 고구려땅인 압록강 일대를 내어놓고 통교를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고려는 서경 이북의 땅을 내어주고 거란과 화해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서희와 거란의 소손녕이 담판을 짓는다.
서희는 송을 견제하려는 거란의 속내를 간파하고 있었고 소손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이 담판으로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서희는 강동 6주의 영유권을 인정받고 서희의 담판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외교로 인정받는다.
사실 서희의 외교담판 이전에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한 기록이 없다. 또한 고려가 이 담판 이후 고구려 계승을 대외적으로 얘기한 공식적인 기록도 없다. 그래서 현재 중국 동북공정 논쟁에서 서희의 발언은 강력한 무기가 되고 있다. 서희의 외교 담판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이다.
왕건의 서경중시
지금의 평양인 고려의 수도 서경을 중시했는데 이 또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증거로 인식되고 있다.
고구려=고려
당시 고려와 동시대 국가들 송, 몽골, 명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기록을 꾸준히 남기고 그렇게 얘기했다. 당시 중국사람들은 고려와 고구려를 같은 나라로 인식했다. 1259년 고려의 태자를 만난 몽골제국의 쿠빌라이는 고려를 옛날에 당태종이 정복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나라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그 나라는 고려가 아니라 고구려이다. 이렇게 보면 고려와 고구려를 같은 나라로 인식한 것으로 본다. 사실 5세기 장수왕 이후 고구려는 고려로 불렸다. 충주고구려비에 보면 고려태왕이라고 나와있다. 중국기록에서도 고려라고 부르는 기록이 훨씬 많다.
대한민국이 코리아로 불리게 된 이유
높을 고, 아름다울 려이다. 당시 고려를 읽을때 '고리(나라이름 리)'라고 읽었다. 그래서 옛날 옛날 고릿적에... 이때 고릿적이 고려시대일 적에 를 의미한다. 그래서 코리아도 고려보다는 고리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는 주변나라와 무역을 활발이했었고 고려의 무역항 벽락도는 송나라와 일본뿐 아니라 아라비아 상인과도 교류를 했다. 이 많은 상인들과 <동방견문록>의 마르코폴로가 고려를 코리아로 알리게 되면서 대한민국이 코리아로 알려지게 되었다.
고려의 이름 기원
통일신라 말기 왕족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면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자 지방에서 호족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중에 궁예가 있었는데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휘하로 들어간 왕건과 손잡고 세력을 확장한다. 그리고 궁예가 내세운 나라이름이 고려였다. 신라왕실에서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안 궁예는 신라에 복수하겠다는 뜻을 담아 신라가 무너뜨렸던 고구려를 계승해서 신라에 복수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궁예의 주 무대가 과거 고구려 영역이었고 궁예가 신임한 송악지역 왕건과 패강진 세력이 모두 고구려 계통의 호족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고려를 소환하는 전략적,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이런 궁예의 고려를 왕건이 가져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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