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왕의 최후
후백제 견훤의 목표는 삼한통일이었다. 그리고 마침 927년 신라 서라벌을 점령한다. 견훤 군의 공격에 궁궐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경애왕은 견훤 앞에 끌려와 무릎을 꿇었다. 견훤은 경애왕을 모욕하고 경멸했고 결국 경애왕을 자신의 앞에서 자결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신라에게 씻을 수 없는 수모를 안겨 준 것이다.
견훤의 이와 같은 행동은 이렇게 해석된다. 견훤은 신라의 장수 출신이다. 그래서 대의명분과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라왕을 죽일 정도로 강력한 힘을 과시하기 위함도 포함된다.
공산전투
한편 견훤의 서라벌 점령 소식에 고려 왕건은 신라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신라고 진격한다. 왕건은 마음이 급해졌고 정예 기병 5000을 이끌고 신라로 향했다. 왕건은 쉬지 않고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서라벌을 점령한 견훤은 왕건의 움직임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견훤은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신라 지역에 익숙한 장수였다. 견훤 군은 고려군을 산속으로 유인했고 고려군은 대구 공산 동수에서 매복해있던 견훤 군대와 맞붙어 싸우게 된다. 너무나 쉽게 이곳에서 왕건의 부대는 무너졌다.
신숭겸이 왕건의 복장을 하고 견훤의 군대를 유인하는 사이 김락, 신숭겸이 전사하고 전군이 패배한다. 이때 왕건은 겨우 몸만 빠져나왔으니 완벽한 패배였다.
공산 전투의 승리로 예천 용주성, 합천 대야성을 견훤이 차지하게 된다. 공산전투 1년후 928년 진주 강주도 견훤이 점령, 나주까지 차지하면서 견훤이 한반도 남쪽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건이 최후의 승리자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공산 전투와 관련된 지명들
▶ 안심역
대구에는 공산 전투의 흔적이 아직도 있다. 공산 전투에서 대패한 후 도망친 왕건이 견훤의 추격을 따돌린 뒤 이곳에 도착해 겨우 안심했다고 해서 안심 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 왕산- 왕건이 도주하다가 숨은 장소
▶ 파군재 -견훤의 군사들에게 쫓겨서 군사들이 흩어진 곳
▶ 실왕리- 원래 시량리였던 곳이 왕을 잃었다고 해서 실왕리가 변해서 시량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왕건은 겨우 목숨만 건지고 패잔병으로 돌아온다. 오자마자 왕건은 자신을 위해 희생한 공신들을 기리는 일에 힘을 쏟았다. 특히 신숭겸을 기리기 위해 지묘사 자리에 그를 위한 사당을 세웠고 그의 아들과 동생에게 큰 벼슬을 내렸다.
공산전투는 왕건이 아끼는 장수들을 잃은 전투였고 신라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을 것이다. 왕건이 공산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대의명분은 확실히 챙겼다고 볼수 있다. 그래서 신라인들에게 삼한을 통일할 왕의 자격을 입증한 것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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