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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궁예 ! 후삼국 시대 이렇게 퇴장! (철원 한탄강, 명성산 유래)

676년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다. 이 시대를 통일신라라 부르고 그 이후 다시 후삼국시대 후백제, 신라, 태봉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태봉은 후삼국시대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 그러나 우리에겐 너무나 낯선 나라 이름 태봉이다. 태봉의 왕은 궁예이다.  그러나 궁예는 마지막에 가장 믿었던 왕건에게 쫓겨나게 된다.

 

 

궁예 이야기 

 

궁예는 왜 안대를 쓰고 있을까? 
궁예가 태어난 날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궁예는 태어나자마자 쫓기는 운명이었다.  궁예가 태어나자마자 한 남자가 포대기에 쌓여 있는 궁예를. 지붕 위로 올라가 던져버린다.  이때 궁예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지만 떨어지는 갓난아이 궁예를 유모가 받아내지만 그 순간 궁예의 눈을 찌르고 만 것이다.  목숨은  구제했으나 유모의 손가락에 찔려 한쪽 눈을 잃게 되었던 궁예였다.

 

 



그렇다면 남자는 왜 궁예를 죽이려 했던 걸까? 

그것은 궁예의 정체때문이다. 궁예는 신라의 왕자였기 때문이다. 궁예는 후궁의 아들로 궁궐 밖 어머니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탄생 소식은 궁궐로 곧장 전해지게 되고  궁궐에서 천문을 해석하는 일을 하는 일관의 해석에 따르면 궁예는 너무나 불길한 운을 타고났기 때문에 나라에 해가 된다고 하여 기르면 안 된다고 했던 것이다. 5는 양수로 양과 양이 겹쳐 양기가 센 날이라는 것. 그런 날 아이가 태어나면 불길하다는 얘기가 있었다. 또한 궁예의 아버지는 47대 헌안왕, 또는 경문왕이라는 얘기가 있다. 

 



유모는 궁예가 왕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자신의 아들로 키운다. 그 후 10년 뒤 유모는 궁예에게 그가 왕자라는 사실을 밝힌다.  출생의 비밀을 듣고 궁예는 출가를 결심한다. 그때가 10세였다. 절로간 궁예는 법명 선종을 짓고 절에서 보낸다.  궁예가 있던 현재의 영월 근처로 추정하는 절  흥교사에 있었다.

 


궁예는 승려 생활을 계속할 생각은 없었다.  궁예는 절을 나와서 호족 양길을 찾아간다. 궁예는 뜻을 펼치기 위해 호족의 밑에서 세력을 키우려고 했고 원주지방 대호족 양길을 택한 것이다. 치악산을 거점으로 주천, 울오, 내성, 어진, 명주를 점령해 나갔다.  처음 궁예가 이끈 호족은 600명 정도였으나 3,500여 명까지 확장되었다.  이제는 양길의 군대가 아닌 이제는 궁예의 군대가 되었다.

 

견훤(867~936: 신라 군인 출신 호족으로 훗날 후백제의 초대 왕이 된다), 장보고 (780~841: 청해진 중심으로 해상무역을 주도 한국사에 기록된 최초의 호족이다)


그리고 서쪽 지역 패서지역으로 진출하는  때 송악 호족 왕륭의 아들 왕건을 만나게 된다. 궁예가 왕건에게 내린 첫 번째 임무는 궁예가 세울 나라의 성을 쌓는 일을 맡기게 된다. 그리고 왕건은 훌륭하게 첫 명령을 마무리한다. 

 



 궁예는 한강 중상류를 차지하려고 했고 이곳은 양길이 차지하고 있던 곳이었다.  결국 왕건의 도움을 받아 양길을 물리쳤다. 900년 왕건에게 경기도 남부, 충청도까지 진군을 명령한다.

 

 

그리고 결국 중부지역을 장악하게 된 궁예는 901년 국호를 고려라고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 궁예가 세운 나라는 교과서에서 후고구려로 알고 있다.  궁예의 고려=고구려 계승의 의미가 있었다.  

 


후삼국 시대 개막

궁예가 고려를 건국하기 1년 전 탄생한 또 다른 나라가 있었다. 견휜이 세운 후백제가 있다. 궁예의 후고구려, 견훤 후백제, 통일신라가 격돌하면서 혼돈의 후삼국 시대가 개막된다. 

 

 


후고구려 왕인 궁예는 다음 목표가 있었다.  궁예의 첫 목표는 견훤의 후백제를 공격 특히 나주(금성)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903년 후백제를 공격한다. 후백제 공략의 적임자 왕건을 보내고 왕건은 해상을 이용해  나주(금성)를 공격하게 되고 나주의 해상 세력은 자진해서 왕건의 군대에 합류하면서 금성 지역 10개 군현을 점령하면서 왕건의 완벽한 승리였고 당시 왕건의 나이는 27세였다.  그리고 궁예의 가장 신임받는 장수로 성장한다.

 


궁예는 송악-> 철원으로 옮기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궁예는 고려(901)의 국호를 마진(904)-태봉(911)으로 바꾸고 자신을 미륵불이라 하며 신격화하며 자신이 원하는 나라를 만들기 시작한다. 

 

궁예의 철원 도성이 있던 곳

 

2인자 된 왕건

왕이 곧 부처 미륵불이라고 하며 강력한 왕권을 갖으려 한다.  궁예는 관심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하여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하면서 민심을 잃어간다.

 

 

이때 왕건은 궁예의 폭정을 피해 지방 근무를 자처한다.  912년 나주로 내려간 왕건은 다시 한번 견훤과 싸우면서 나주를 지켜낸다.  승전보를 들은 궁예는 왕건을 수도로 불러들여 왕바로 아래 직책인 시중에 임명을 한다. 이렇게 왕건은 태봉의 이인자가 된다. 

아지태 사건 
아지태라는 간신이 궁예의 마음에 들기 위해 사람들의 죄를 거짓으로 만들어 궁예에게 고하였고 이를 지켜보던 왕건이 아지태를 불러 추궁하니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고 자백을 받게 된다. 이 사건 이후 왕건파와 궁예파로 나뉘게 되었다.  왕건의 급부상에 위기의식을 느낀 궁예는 왕건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왕건의 고려 건국
그리고 왕건을 관심법으로 읽고 반역을 꾀하였다고 하니 왕건은 이에 자신이 반역을 꾀했다는 거짓자백을 하면서 위기를 넘기게 된다.  그리고 6월 14일 궁예의 폭정에 참지못한 신하들이 궁예를 쫓아내고 왕건은 혁명에 성공하면서 고려 건국을 선포한다. 

 

 

궁예의 최후 (명성산, 한탄강 유래) 

 

이때 궁예는 산으로 피신을 했고 몇일을 굶다가 보리를 훔쳐 먹고 발각되어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원도 철원 궁예의 울음소리를 간직한 산이 있다는데 명성산이다.

 

 

울명, 소리 성 , 내산 죽기 전 궁예가 토한 울음소리가 퍼졌다는 전설의 산이다.  오늘날에는 울음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옆에 위치한 한탄강은 궁예가 운명을 다함을 한탄했다는 전설이 있는 강이다.

 

한탄강

변변한 무덤없이 역사에서 퇴장한 궁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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