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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벌거벗은 세계사

바이킹 역사 300년 :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아메리카 발견, 노르망디 왕조 탄생 배경 141-3

바이킹 최초 발견 

바이킹은 잉글랜드에서 거센 저항에 막혔으나 그 외 지역에서는 거침없이 세력을 확장해 8세기 북유럽에서 덴마크 왕국이 등장했고 9세기 노레그 왕국 건국(오늘날의 노르웨이 왕) 되었다. 그러면서 바이킹들은 스칸디나비아에서 동쪽 서쪽 남쪽으로 자신들의 땅과 영향력을 넓혀갔다. 

 

9~10세기 바이킹의 활동 영역

 

아이슬란드 발견

노르웨이 바이킹들은 서쪽으로 항해를 해 무려 약 1000km를 항해한 끝에 화산과 얼음의 섬인 아이슬란드를 발견하게 된다. 이후 노르웨이 바이킹들은 아이슬란드에 정착하며 빠르게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50년 만에 인구가 약 무려 1만 명으로 증가하게 된다.

 

그린란드의 발견 

이에 다시 서쪽으로 항해를 해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인 그린란드를 발견하게 된다. 그린란드는 세계 빙하의 10분의 1을 차지하는 엄청한 규모의 섬이었다. 또한 이곳은 천연자원이 풍부하기로 유명한다.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10% 이상 , 천연가스 30% 매장, 또한 전자 기기에 사용되는 희귀 광물인 희토류가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곳이다. 

 

바이킹은 이 얼음섬에 초록의 땅이라는 뜻의 '그린란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이유는 그린란드를 살기 좋은 땅이라고 속이기 위함이었다. 그린란드가 얼음의 땅임을 알고 실망한 바이킹은 함께 갈 동료들이 필요해 '초록의 땅' 이라고 작명을 해서 다른 바이킹에게 살기 좋은 곳을 발견했다고 과대광고를 했고 거짓 이름에 속아 수천 명의 바이킹이 그린란드로 이주했다. 

 

 

당시 사람들은 눈으로 덮인 척박한 땅에 당황했으나 엄청난 적응령으로 정착지를 일구는데 성공한다. 척박한 스칸디나비아에서 생활한 바이킹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이킹의 최초 아메리카 진출 

유럽인 중 최초로 아케리카에 도착한 건 바이킹이었다. 1492년 10월 12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도착 시기보다 약 500년이나 앞서 1000년경 벌어진 대사건이었다. 그린란에 살던 바이킹은 또 다른 땅을 찾아 서쪽으로 향해한 결과 바이킹은 지금의 캐나다 동부 지역에 도착한다.  그리고 바이킹은 이곳에 자신들의 정착지를 만들고 '빈란드' 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사실이 1960년대가 돼서야 캐나다 동부 해안에서 바이킹의 유물과 정착지가 발견되면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 197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기정사실화되었다. 

 

캐나다 뉴펀랜드 빈란드
빈란드 vinland 뜻 : 포도주의 나라

 

 

 

스웨덴 바이킹 - 러시아 제국 뿌리

동쪽으로 뻗어나간 바이킹은 상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유럽의 안쪽에 있는 콘스탄티노플은 물론 유럽을 넘어 중동 이라크 바그다드 시장까지 무역로를 넓히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9세기 중반이후 바그다드의 상권이 약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바스 왕조가 흔들리며 수도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바이킹들이 교역을 멈추고 이슬람교도들을 약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이킹들은 카스피해 연안을 따라 여러 도시를 약탈했다. 약 300~400년 뒤 13세기 몽골의 침략 전까지 무서운 침략자로 중동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러던 중 한 지역에 자리를 잡고 키예프루스라는 나라를 세우기도 했다. 이 나라는 러시아 제국의 뿌리가 된다. 

 

 

 

노르망디의 탄생 

세력 확장을 위한 바이킹의 기세는 멈추지 않았다. 9세기 말부터 노르웨이 출신의 바이킹 수장이 유럽의 강국인 프랑크 왕국을 공격하면서 바이킹의 기세는 더욱 거세지게 된다. 프랑크 왕국은 481년 프랑크족이 갈리아에 세운 왕국으로 이후 분열되어 오늘날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기반이 되었다. 

 

프랑크 왕국

 

당시 프랑크 왕국은 세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서프랑크 왕국의 수도 파리를 수천명의 바이킹이 공격했고 이에 바이킹 수장에게 공작의 작위를 수여하고 왕국 북부의 땅을 줬다. 바이킹 수장은 가톨릭 세례를 받고 백작으 딸과 결혼까지 하면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때 바이킹이 받은 땅은 노르망디로 이때부터 수많은 바이킹이 이곳으로 이전해 정착했고 사람들은 바이킹이 북쪽에서 왔다고 해서 노스맨(Norsemen) 이라 불었다. 이 노스맨에서 노르망디라는 지역명이 탄생했고 이곳에 사는 사람을 노르만인이라고 불렀다. 

 

 

이때 노르망디에 자리 잡은 바이킹 수장은 세력을 키우기 위해 다른 나라의 공주와 정략결혼도 했고 주변 바이킹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무역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여들었다. 덕분에 노르망디는 강력한 공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프랑크 왕국 탄생 

유럽 전역으로 뻗어나가던 바이킹에게 10세기경 정점을 찍은 인물 크누트 대왕이 등장한다. 크누트 대왕은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던 덴마크 왕국의 왕자였다. 아버지와 함께 바이킹 군단을 이끌고 잉글랜드 왕국과 싸워 승리하며 승승장구했고 덴마크의 왕이였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잉글랜드의 왕이 되고 노르웨이까지 공격해서 노르웨이 왕까지 되었다. 

 

 

이렇게 크누트는 잉글랜드 덴마크 노르웨이 세 나라를 다스리는 바이킹의 대왕으로 올라섰다. 크눜크 왕국이 북해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북해제국이라고 부르며 서유럽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다음으로 강력했던 크누트였다. 하지만 크누트가 사망하며 북해제국은 붕괴된다.

 

노르만 왕조 시대 탄생 배경

크누트의 아들들이 권력 다툼을 하느라 북유럽으로 돌아간다. 이때 잉글랜드의 왕인 에드워드 1세가 크누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가 후계없이 갑자기 사망한다. 이로 인해 다시 한번 왕좌의 게임이 시작되었다. 바이킹의 후예였던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 죽은 에드워드 왕의 처남인 잉글랜드 백작 해럴드 2세는 바이킹 어머니와 잉글랜드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바이킹 혼혈이었다. 마지막으로 왕좌의 게임에 도전한 왕은 노르웨이 왕 하랄 3세였다. 크누트 왕의 뒤를 이어 노르웨이 왕에 오른 정통 바이킹이었다.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이야기를 그림으로 묘사한 자수 작품 : 바이외태피스트리

 

 

가장 먼저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한 인물은 해럴드 2세였다. 이 소식을 듣고 잉글랜드로 쳐들어온 것은 노르웨이 왕 하랄 3세였다. 이후 스탬퍼드 다리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이 전투의 승자는 해럴드 2세였다. 그런데 이때 약 1만 4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노르망디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로 쳐들어온 것이다. 1066년 10월 14일 헤이스팅스 전투를 벌이게 되고 이 전투에서 해럴드 2세는 노르만 병사들이 쏜 화살에 맞아 사망하면서 잉글랜드 왕좌의 최종승자는 바이킹의 후예이자 노르망디의 공작이었던 윌리엄 1세에게 돌아갔다.

 

윌리엄 1세는 2달 뒤 1066년 12월 25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후 잉글랜드의 왕이 된다. 노르망디에서 건너온 바이킹의 후예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왕이 되면서 오랫동안 이어오던 앵글로색슨족의 왕조가 몰락하고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왕조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바이외 태피스트리 

이 이야기가 프랑스 보물로 기록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자수작품으로 프랑스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프랑스의 생활과 역사를 복수 있는 귀중한 보물이다.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 이야기를 58장면으로 묘사

 

 

윌리엄 1세 바이킹의 후계 어디까지?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 왕과 노르망디 공작을 겸임하면서 이후 그의 후예인 잉글랜드 왕들이 대대로 물려받게 된다. 

 

 

 

그러나 이상황은 프랑스 왕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그래서 노르망디 땅을 두고 끊임없이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이후에도 대립하게 된다.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서로 견제하며 사이가 나빠지면서 훗날 백년전쟁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바이킹의 세력 다툼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관계를 바꿨다.

 

 

 

백년 전쟁 (벌거벗은 세계사 42회 )

백년 전쟁 시기 100년 전쟁은 프랑스와 영국이 1337년~ 1453년까지 113년간 오랫동안 전쟁을 했다. 100년 전쟁의 서막은 1328년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한다. 당시 프랑스 카페 왕조 마지막 왕인 샤를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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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후 잉글랜드 왕조는 여러 번 교체되었으나 윌리엄 1세의 핏줄은 모계를 통해 노르만 왕조- 플랜태저넷 왕조-랭커스터 왕조-요크 왕조-튜더 왕조-스튜어트 왕조- 하노버 왕조-윈저 왕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거쳐 현재 영국을 다스리는 국왕인 찰스 3세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바이킹은 영국 왕조의 DNA를 바꾸게 된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바이킹의 시대는 윌리엄 1세의 치세에 급격히 저물고 만다. 바이킹이 기독교와 유럽 문화를 받아들이며 깊이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바이킹의 대외 활동이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8~11세기 약 300년간 유럽을 휩쓴 바이킹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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