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적장자 왕 문종을 두번이나 이혼시키고 자신의 두 아들 또한 이혼시켰는데 조선 시대 최고의 성군 세종도 가족일 만큼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세종의 적장자 문종
조선은 건국 이후 적장자에 의한 왕위 세습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1~4대 세종까지 아무도 적장자가 없었기 때문에 세종의 아들 문종의 결혼은 조선의 적장자 왕위 계승의 첫번째 사례였기 때문에 세종에게 특별했다. 유교 종법상 정통성 있는 왕위 계승의 기회로 정말 상징적이고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지 2년만에 사망한 문종이었다.
1. 세종의 첫 번째 며느리 퇴출
문종은 문무를 두루 겸비한 왕으로 즉위 전에 세종 곁에서 정치 경험을 쌓고 있었다. 세종은 무려 3년이나 며느리감을 고르고 또 골랐다. 심사숙고 끝에 세자빈을 고른 세종은 드디어 군대 최고 지휘관 정 3품 상호군 김오문의 딸이었다. 세자빈이 된 그녀는 세종에게 휘빈 김씨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 생활은 2년만에 끝이 난다.
휘빈 김씨 퇴출 이유
휘빈 김씨를 세자 문종이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에겐 무관심했으나 몇몇 궁녀들은 가까이 지냈던 문종이었다. 결혼 당시 문종은 14세에 불과했고 15세가 된 문종때, 결혼 1년 후 휘빈 김씨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유교의 예법에 따라 할아버지의 1년 상을 치러야 했다. 그래서 1년간 합방이 불가했다. 결혼 후 약 2년 동안 합방을 할 수 없었고 문종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자식도 낳을수 있는 기회도 없는 그녀였다. 그래서 세자가 올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압승술을 알아낸다.
압승술이란 다른 여인의 기를 눌러 사랑싸움에서 이기는 술법이다. 문종이 좋아했던 궁녀를 제압할 비책으로 문종이 좋아하는 여성의 신을 잘라서 불에 태워서 가루를 만들어 술에 타서 먹이면 사랑을 받게 되고 그 여자를 배척한다는 것이었다. 이 비술을 하려고 세번이나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렇게 세자빈이 비술을 쓴다는 말을 들은 세종은 깜짝놀라고 이에 세종은 세자빈을 폐출시켰다.
그 다음날 바로 금혼령을 내린다. 삼간택을 통해 세자빈을 다시 뽑는다.
두번째 세자빈 간택 과정
금혼령을 내림
금혼령을 내려 국혼이 있음을 알린다. 금혼 대상 연령대는 평균 10~15세였고 해당 나이의 처녀들은 지원서인 간택단자를 제출할수 있었다.
간택단자
1882년때 세자 순종의 결혼식을 위해 받은 간택단자이다. 간택단자 첫줄에는 나이, 사주, 등 개인정보를 기재하고 다음줄에는 아버지, 할아버지의 관직과 이름을 적어 가문의 명성을 알수 있도록 했다. 간택에 집안의 정치적 성향까지 고려했다. 이렇게 간택단자로 30여 명 정도를 추려 삼간택에 돌입한다.
초간택
초간택에는 공정성을 위해 복장을 통일해 같은 색깔의 의상을 입혔다. 노란 저고리에 붉은 치마였다. 이 초간택에서 5~7명의 합격자가 뽑혔다.
재간택
재간택에서는 식사예절을 살폈는데 왕실 웃어른들과 식사를 하며 식사 예절을 평가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최종 후보 3인을 선택한다.
삼간택
왕실 최고 어른들의 압박면접이 이루어지는데 질의 응답을 통해 성품과 현명함을 평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이 간택에서 중요하게 본 것이 있었다. 바로 외모였는데 가문과 부덕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외모라고 했다.
2. 두 번째 퇴출 며느리 순빈 봉씨
그렇게 뽑힌 두번째 며느리가 순빈 봉씨였다. 그러나 순빈 봉씨는 술 마시기를 즐겼고 질투가 심해 궁녀를 때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세종은 세명의 소실을 들인다. 명문가 출신 여성 3명을 세자의 소실(후궁과 같은 개념, 세자의 첩)로 간택해 들인다. 그리고 소실 권씨가 임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순빈 봉씨도 임신을 하게 되지만 한달 후 유산을 한다. 그러나 순빈 봉씨는 임신이 아니였다. 소실에 대한 질투로 거짓 임신을 꾸민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참는다.
얼마 후 순빈 봉씨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한다. 동성애를 즐긴다는 것이었다. 이에 세종은 더이상 참지못하고 결국 1436년 10월 다시 한번 세종은 며느리를 쫓아낸다.
문종의 세번째 부인 권씨
문종의 세번째 부인은 1년 전 딸을 낳은 소실 권씨였다. 이때 문종의 나이가 23세로 아직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세종은 문종이 마음에 두고있는 홍씨 부인이 아닌 한번 아이를 낳아본 권씨를 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권씨는 세자빈 책봉 5년 뒤 결국 아들은 낳는다. 그러나 손자가 태어난 바로 다음날 권씨는 산후병으로 사망한다. 이렇게 적장자 단종을 본 다음날 문종은 갑자기 아내를 잃는다.
이후 문종은 새로운 아내를 맞이하지 못한채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세종의 상이 끝날 즈음 세상을 떠나면서 재위 기간 동안 왕비가 없었던 조선의 유일한 왕이 문종이다.
3. 세종이 이혼시킨 또 다른 며느리들
세종이 이혼시킨 며느리는 문종만이 아니였다. 세종의 적자 임영대군과 영응대군의 아내도 쫓아냈다. 임영대군은 개국공신 남씨 부인과 결혼했는데 병이 있다는 이유로 쫓아냈다.
또한 세종과 소헌왕후의 막내 아들 영응대군의 아내도 쫓아냈다. 이유는 세종은 영응대군을 애지중지했고 11세에 영응대군의 간택에도 직접 참여했던 세종이었다. 그렇게 간택된 며느리는 고려시대부터 대대로 관료를 배출한 유서깊은 집안의 송씨였는데 그녀도 병이 있다는 이유로 5년만에 내쫓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세종의 뜻이였다. 그래서 세종이 승하하고 막내아들 영응대군은 송씨를 그리워하다가 다시 송씨와 살았다.
대군의 부인들 퇴출 이유
유교에서 남편이 아내를 쫓아낼 수 있는 일곱가지 칠거지악 사항이 있다. 그 중에 병(악질)은 칠거지악 중 하나 로 병으로 인해 자손을 못 볼까봐 내쫓긴 조선의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쫓겨난 임영부인 남씨는 70대까지 장수했다.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는 그 뒤로 딸을 둘이나 낳았다. 이것을 보면 그렇게 심각한 병은 아니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만기친람이란 임금이 만가지 일을 보살핀다는 뜻으로 세종은 지독한 워커홀릭이었다. 정사만 돌본 것이 아니라 아들의 혼인도 정사를 보듯 개입했던 것이다. 인재를 등용하며 애민정신으로 정사를 돌봤던 세종이었으나 며느리 문제만큼은 한 가정의 아비로서 지나치게 엄격했던 세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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