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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이전 상황 (통리기무아문 별기군 설치, 임오군란) 41-1
1884년 8월 베트남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프랑스사이에 청불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 청나라 군대 절반이 빠져나간다는 것이었다. 이에 김옥균은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1884년 10월 17일 조선의 수도 한성 우정총국(=우체국)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우정총국은 조선 26대 왕 고종은 우편 업무를 담당하도록 세운 근대적 기관으로 10월 17일은 우정총국 설립 축하 연회날이었다. 당시 우정국 총책임자 홍영식을 중심으로 김옥균 민영익 등 조선 고위 관료들과 미국, 영국, 청나라등 각국 외교관들이 한데 모인 연회장이었다.
갑신정변 당일
정변을 계획하면서 김옥균은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고 1884년 일본 공사관을 찾아가 신식 군대 백여 명을 지원받는다. 그리고 정변에 동원할 군사를 자체적으로 200여명 더 모은다. 1884년 10월 17일 우정총국 설립 기념 연회가 열리는 날
갑자기 어딘가에서 불이야 소리야 함께 우정총국 근처 초가집에 불이 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영익이 온몸이 칼에 찔러 피투성이가 된 체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우영사 민영익이 괴한에게 습격을 당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우정총국은 아수라장이 된다. 그리고 얼마후 연회장 밖, 창덕궁에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경우궁으로 피신한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 일하던 5명의 관료들은 홍영식은 30세로 당시 우정총국 총책임자로 축하 연회 날을 거사일로 정할수 있었다. 김옥균은 34세 외교통상관청의 차관이었고 서광범은 26세 통리군국사무아문 차관급 관직, 박영효는 24세 전 한성판윤 ,서재필은 21세 조련국 사관장을 맡고 있었다.
정변의 주역들은 젊은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서양의 근대적 제도를 받아들이고 조선의 제도를 변화시키려한 사상 개화사상때문이었다. 고종 역시 근대화를 통해 강한 조선을 만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갑신정변 5인방과도 생각이 같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고종과 5명은 대립한다.
갑신정변 2일차
김옥균은 청나라와 우호적이었던 온건개화파를 살해했고 고종과 명성황후가 믿던 환관도 살해하면서 그날 밤 죽은 사람만 7명이 죽었다. 그리고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바로 자기를 멋데로 내각 인사 임명안을 발표한다. 김옥균을 호조참판(기획재정부차관), 홍영식은 좌의정, 박영효는 전후영사, 서광범은 좌우영사 겸 대리외무독판, 서재필은 병조참판을 맡은 것이다. 국가의 주요 요직을 전부 갑신정변 세력이 차지했던 것이다.
새로운 인사 개편을 발표한 이때 고종은 창덕궁으로 돌아가겠다고 했고 이를 거절한 김옥균으로 인해 고종은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 일본은 이를 도와준다. 그렇게 갑신정변 2째날 오후 고종과 명성황후는 창덕궁으로 옮기고 경계를 강화한다.
갑신정변 3일차
김옥균은 내각 발표에 이어 조선의 근간을 흔드는 충격적인 내용을 발표한다.
당시 발표한 조항은 80여개가 있었으나 현재는 14개 조항만 전해지고 있다.
1번의 내용은 인질로 잡혀있기 때문에 청나라가 요구하는 것이 있을 것이라 자주적인 조선으로 출발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을 대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2. 중요한 회의를 고종을 제외하고 진행하겠다는 의미였다.
삼일천하 갑신정변
이 개혁 정강에 가장 충격을 받은 이가 바로 고종이었다. 개혁정강 그날 오후 청나라군 1500명이 창덕궁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고종과 명성황후 세력들이 청에 연락을 취한 것이다. 이에 김옥균과 정변 세력은 청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되고 1884년 10월 19일 갑신정변은 3일 만에 실패로 끝난다. 그래서 갑신정변을 삼일천하라고 부른다.
암살된 김옥균
김옥균은 1884년 10월 26일 몰래 일본으로 갔고 일본은 김옥균의 망명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일본은 김옥균을 도와주지 않자 이후에 1894년 2월 17일 청나라를 갔다. 며칠 후 상하이에 도착한 김옥균은 여유롭게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김옥균의 방으로 홍종우가 들어왔고 김옥균은 머리와 몸에 총을 맞고 즉사한다.
능지처참형된 김옥균
홍종우(1859~1913) 는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으로 김옥균과 동행한 사람 중 한명이다. 그는 고종이 보낸 자객이었던 것이다. 1984년 2월 22일 44살의 나이로 김옥균은 사망한다. 이후 김옥균의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서 시신을 여러 조각으로 찢는 능지처참형을 내린다.
그후 김옥균의 머리는 효수된다. 그리고 대역부도옥균 (임금과 나라에 큰 죄를 지었다) 이라고 써서 다시는 쿠데타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본보기를 보인 것이다.
갑신정변의 의의
한때 고종과 함께 자주 독립과 근대화를 꿈꿨던 김옥균의 생은 비참하게 끝이 난다. 오늘날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조선의 자주독립을 외치면서도 일본이라는 외세의 힘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근대사회로 나가기 위한 최초의 정치 개혁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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