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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김유신은 어떻게 추존왕까지 되었나? 39회

천년가까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도시전체가 박물관이라 불리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묘는 12 지신이 새겨져 있을 만큼 크고 왕릉과 같은 위용을 자랑한다. 신라의 명장이자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김유신은 가야 왕족 혈통이었다.  

 

김유신 장군묘
김유신 장군묘의 십지지신 조각상

 

가야 출신 김유신 신라 진골되다.

가야는 연맹국가로 금관가야 출신으로 42년 김수로왕에 의해 세워진다. 금관가야는 가야연맹의 초기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성장한 나라였다. 금관가야의 10대 왕은 구해왕(김구해: 재위 521~532)으로 김유신의 증조 할아버지였다. 구해왕이 집권하던 6세기경 금관가야는 위기에 빠진다. 가야연맹은 적국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나라로 영토 확장을 위해 신라는 가야연맹을 공격했다. 구해왕은 신라 법흥왕에게 찾아가 항복을 했고 이를 받아들인 법흥왕은 구해왕과 가족들에게 신라 진골 신분을 내린다.  

 

신라 골품제


이렇게 가야 왕족의 대우를 받아 신라 진골이 된 김유신 집안이었다. 이것은 신라 왕실의 친인척급 대우를 받는 것이었다.  이후 가야연맹은 신라에 병합되면서 역사에서 사라진다. 

 

 

김유신 조상의 활약

그렇게 시간이 지나 554년 신라에 위기가 찾아온다. 신라 진흥왕 재위시절 백제군이 신라의 요충지 관산성을 습격한다.  백제군은 관산성에 총공세를 펼치고 관산성을 지키기 위해 김무력 장군이 출정한다. 김무력은 구해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가야 항복 이후 신라의 대표 장군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관산성 전투는 신라군의 압승으로 약 3만 명의 백제군을 물리쳤다. 결국 백제의 성왕까지 죽인다. 백제군을 전멸시키고 왕까지 죽인 김무력 장군은 김유신의 할아버지였다. 김무력의 아들 김서현이고 그의 아들이 김유신이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신라정통 귀족 집안의 딸 '만명'에게 반한다. '만명'의 아버지 숙흘종은 진흥왕의 친동생으로 결혼해 김유신을 낳았다.  

 

김유신과 김춘추의 만남

김유신은 화랑으로 들어가 두각을 나타냈고 18세가 되던 해 화랑의 총지도자 국선이 된다. 그리고 김유신은 신라 정통 왕실 혈통 출신 최상위계층의 김춘추를 만난다. 김춘추의 할아버지가 왕위에서 쫓겨나면서 조카인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로써 김춘추는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는 비운의 왕족이 된 것이다.  

 

 

 그러나 김유신은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왕실 혈통의 김춘추가 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김춘추를 통해 신라의 이인자를 꿈꾼 김유신이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 문희와 결혼하면서 자신과 가문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이후 다시 한번 신분상승의 기회를 갖게 된다.  

낭비전 전투  
35살 장수였던 김유신은 영토확장을 위해 고구려의 요충지 낭비성을 선제공격하려 했었다.  

 

 

고구려 요충지 낭비성 위치
고구려 요충지 낭비성 위치



첫 번째 신라의 공격은 패배였다. 그러나 김유신은 홀로 돌격하여 고구려 장수의 목을 베어왔고 다시 고구려 진영을 공격한 김유신은 대승을 거두게 되면서 김유신 장군의 첫 번째 전투로 화려한 데뷔를 한다. 이 전투로 김유신이 총대장이 아니었으나 그 이름이 대표로 기록된다.  

 

선덕여왕 즉위
632년 선덕여왕의 즉위로 김유신과 김춘추는 조정에 활약할 기회가 생긴다. 선덕여왕은 자신이 즉위하면서 자신의 측근을 김유신과 김춘추로 선택한다. 전쟁과 군사담당의 김유신, 정치와 외교담당에는 김춘추를 선택한 것이다. 이후 둘은 중앙 정계를 주도하는 인물이 된다.  

 


대야성 함락 

그리고 선덕여왕 즉위 11년 후 갑자기 백제 의자왕이 신라에 총공격을 가한 것이다. 신라는 백제 국경 근처의 40여 개의 성을 함락당한다. 이때 김춘추는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다.  이유는 함락된 대야성의 성주 김품석이 김춘추의 사위였던 것이다. 김품석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야성을 내어준 것이다. 대야성의 자리는 원래 가야땅이었고 그래서 김유신의 기반이었고 김춘추는 이 자리에 사위를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슬픈 소식이 있었다. 그것은 대야성 성주와 함께 있었던 김춘추의 딸은 백제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 죽음이 끝이 아니었다. 백제는 김춘추의 딸을 모욕하기 위해 딸 고타소의 시신을 백제 감옥에 묻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충격을 받았다.  고타소는 김유신의 조카이기도 했기에 이 둘은 백제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김춘추는 백제에게 복수하기 위해 고구려와 손을 잡으려 했다. 642년 겨울 연개소문에게 백제를 칠 군사를 빌려달라고 하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고구려에 강금당하게 되자 김유신이 김춘추를 구하러 갔다. 

 

김유신의 활약
고구려 동맹에 실패한 두 사람은 조정에서의 입지가 좁아졌고 김유신의 자신의 군사적 역량을 한껏 발휘해야 했다. 이때 선덕여왕은 김유신에게 신라의 최전방 요충지 압량주를 지키도록 한 것이다.  

압량주 위치
압량주 위치


백제와의 접전 끝에 김유신은 대야성 주변 영토를 수복하고 이후도 백제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하며 신라의 수호신과도 같은 장군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당시 신라와 백제의 전투를 거의 김유신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야성의 함락 김춘추의 외교 실패를 김유신의 승리로 만회했다.  

 

비담의 난

647년 선덕여왕 재위 16년 김유신과 김춘추의 정치적 기반이 다시 한번 흔들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비담이라는 인물이 귀족들을 모아서 난을 일으킨 비담의 난이었다. 비담은 당시 귀족 연합을 이끌며 귀족회의를 주재한 신라 최고 관직 상대등이었다. 이들은 선덕여왕을 몰아내려 했고 이유는 '여주불능선리'로 여자는 좋은 군주가 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왜 비담은 16년이 지나서 반란을 일으켰나? 이유는 이때 선덕여왕이 건강이 나빠져 병석에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후계자를 정해야 하는데 그 후계자도 선덕여왕의 사촌동생 승만공주였던 것이다. 이에 비담은 다시 남자를 왕으로 세우고 차기 여왕의 즉위를 막고자 했던 것이다.  

 

 

김유신은 반란의 불씨를 끄기 위해 왕실 군대의 선봉에 서게 되고 반란군 제압에 성공한다. 김유신은 비담 등 귀족 30명을 참수형에 처하면서 10일 넘게 이어졌던 비담의 난은 끝이 난다. 김유신 덕분에 왕위에 오른 진덕여왕은 왕실의 안정을 가져왔고 김유신과 김춘추는 신라조정의 중심이 된다.  

 

 

나당연합- 대야성 수복

이들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당나라로 향했다. 당시 당나라는 절대군주 당태종이 군림하는 아시아 최고 강대국이었다. 나당연합이 체결되고 김유신은 백제에 함락당했던 대야성을 되찾았고 김품석과 조카 고타소의 유해도 수습했다.  

 김춘추 왕되다. 
654년 진덕여왕이 승하하면서 진덕여왕의 가장 가까운 핏줄은 김춘추였고 왕실의 대를 이을 후계가 없던 상황에서 654년 김춘추가 왕으로 등극한다.  

태종 무열왕

 

백제 멸망
김춘추가 왕이 되기까지 가장 힘이 되었던 사람이 바로 김유신이 되다. 김춘추 집권 6년 뒤 660년 김유신은 가야계 출신으로 신라귀족의 정점인 상대등에 오른다.  그리고 660년 나당연합군으로 지금의 충남 부여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향했다. 백제의 의자왕은 항복하고 백제는 멸망한다.  

 

김유신 흥무대왕 추존

그리고 661년 김춘추는 사망한다. 668년 신라는 고구려도 멸망시키고 신라 왕실과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며 여생을 보내다 673년 7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김유신은 진평왕부터 문무왕까지 5명의 임금을 섬겼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한일통을 시켜 새로운 신라를 열었다. 이러한 김유신의 공로를 인정받아 김유신은 사후에 160년 뒤 흥무대왕으로 추존된다. 신라혈통이 아닌 가야 혈통을 왕으로 추존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김유신 장군 묘 

 

김유신 무덤 오른쪽에는 1934년 김유신의 후손 김용희가 세운 비석(내용: 개국공순충장열흥무왕릉)이 있다. 이 비석은 비만 오면 글자가 바뀐다. 건립 당시 묘라고 세겨졌든 것을 평평하게 만든 뒤 릉으로 바꾼 것이다. 

 

 

조선 숙종 때에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관등성명은 그대로 하고 왕이 아니었기에 묘라고 했지만 이후 사후 왕으로 추존을 받았으니 왕릉이라고 나중에 덧대어버린 것이다. 한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는 가에 대한 기준은 시대가 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