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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고려 거란의 3차 침입 : 강감찬 귀주대첩 , 흥화진 전투=삼교천 전투

[이전글] 거란 2차침입 

 

1018년 12월 거란의 3차 침공이 있었다. 이번에 성종이 대신 오지는 않았으나 대신에 거란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다. 소배압은 1차 침입때 서희와의 담판으로 유명했던 소손녕의 형이었다. 그리고 2차 침공때 개경을 함락시킨 경험이 있는 소배압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이를 대비해 고려군 20만 8여 명을 준비했고 고려를 이끄는 장군이 강감찬 장군이었다. 

 

강감찬 흥화진 전투 (=삼교천 전투) 

거란군의 기존 루트는 흥화진, 통주, 곽주를 거쳐 서경으로 오는 경로였기에  강감찬은 흥화진에서 첫 전투를 대비를 하고 있었다. 이곳은 2차 거란 침입때 양규 장군이 목숨걸고 지켜냈던 곳이다. 

 

거란의 침입루트

 

흥화진 전투에서 강감찬 장군은 흥화진 근처 삼교천이 흐르고 있었고 지형이 좁아지는 곳에 소가죽과 밧줄을 이용해 냇물을 막아 놓았다가 거란군이 쳐들어올때 일시에 물을 터트려 거란군이 혼비백산한 사이에 공격해 몰살시켰다. 강감찬은 이때 거란이 흥화진을 지나가지 않을 것을 대비해 기병 1만 2천병을 미리 매복시켜놨다. 다양한 경우의 전투 상황에 대비해 촘촘한 수비벽을 세운 것이다. 

 

삼교천 수공작전 

 

 

청야 전술 

흥화진 전투에서 거란족이 패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병력은 개경으로 진격을 했다. 이듬해 정월 황해도 신유까지 진출을 하게 되고 이때 고려는 청야 전술을 펼치면서 거란군은 끝내 개경에 닫지 못했다. 개경근처 금교역에서 회군을 시작한다. 추측으로는 보급문제가 아닌 개경에서 내려오고 있는 강감찬의 주력군이 두려웠을 것으로 추측한다. 

 

* 청야 전술: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 그러나 고려측 기록과 거란측 기록이 다르다. 우리측 기록은 결국 거란이 개경을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나오는데 거란측 기록은 개경에 도착하니 고려군이 도망가서 약탈하고 돌아왔다로 나와있다. 

 

귀주대첩 

강감찬은 첫 전투 삼교천 전투 이후 35일 뒤에야 연주와 위주에서 거란군과 조우한다. 그후 강감찬 장군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쫓아 귀주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귀주성은 남서북쪽은 경사면, 동쪽은 평지로 이루어진 곳으로 기병을 운용하는 거란군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또한 거란족은 서쪽의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었고 고려군은 평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귀주성 위치 

 

실제 전투에서 거란군이 구릉지대에서 강을 하나 건너오고 고려군도 물줄기 하나를 건너 드넓은 평야 지대에서 전투를 벌였다. 또한 남쪽에서는 지원군까지 오고 있었다. 30만 병력의 격돌, 양쪽 군사들이 대치를 하며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귀주대첩에서 가장 이상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거란군의 뒤편에서 김종현 기마 부대 1만명이 나타난 것이다. 거란군은 김종현 부대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남풍이 불어오고 있었고 기병과 활을 사용하는 거란군에게 맞바람이 불어와 불리한 상황에 쳐했던 것이다. 

 

 

 

귀주대첩은 완벽한 고려의 승리였다. 거란군은 귀주에서 패하고 압록강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퇴각하는 거란군을 국경끝까지 쫓아가 섬멸시킨다. 소배압은 갑옷, 투구, 병장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로 인해 겨우 살아간 소배압은 파면되었다. 시체가 들을 덮었고 사로잡은 포로, 노획한 말, 낙타, 갑옷, 병장기를 다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 천이었으니 거란의 전례없는 패배였다. 

 

귀주대첩 의의

고려 거란 전쟁은 993~1019년 26년 간 계속된 전쟁을 귀주대첩의 승리로 종식이 되었다. 이후 강감찬은 현종을 도와 고려 100년 평화의 기틀을 다진다. 귀주대첩이후 고려는 거란과 사대관계를 복원하지만 주도권을 쥔 고려는 송과도 자유롭게 교류한다. 고려는 거란과 송의 균형추 역할을 하며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실현했다. 

 

 

삼교천 전투는 거짓 or 진실? 

흥화진 전투는 기록상 수공의 원조이다. 수공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을 떠올리지만 사실 일제강점기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나온 기록으로 역사적 승리에는 비범한 전술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만들어진 기록일 가능성이 높지만 흥화진 전투는 당대의 기록이다. 그러나 흥화진 전투가 일어난 시점이 양력 1월 18일 경으로 겨울인데 북쪽의 겨울은 더욱 춥고 강물이 얼어있을 가능성이 크기때문에 수공작전을 펼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강감찬의 영웅화 

강감찬은 장원급제한 문신으로 26년간 역사서에는 기록을 찾기 힘든 인물이다. 그러다 강감찬의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이 거란의 2차침입때  현종의 몽진을 주장하면서 역사서에 첫 등장한다. 그리고 2차, 3차 전쟁사이 10년 동안 매우 빠른 속도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고 강감찬이 귀주대첩을 했을 나이는  71세였고 소배압은 69세였다. 또한 강감찬이  귀주대첩을 포함한 전투경험은 단 3개월뿐이다. 

 

[그날 128,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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