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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공민왕 개혁정치 그리고 죽음까지

 

 

 

 

공민왕은 왕이 되자 즉위교서를 발표한다. 교서에는 일국갱시 : 한나라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었다. 즉위교서 발표와 함께 개혁을 시작한다. 공민왕은 몽골의 풍습이던 변발을 풀어헤치고 호복도 벗으며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전 분야를 아울러 개혁을 펼쳤다. 

 

 

 

조일신의 난 

그러나 공민왕의 개혁에 기황후의 거센 반발이 있었고 이걸 보던 공민왕의 최측근 조일신이 기황후의 일족 중 기황후의 오빠인 기원을 제거했다. 공민왕의 개혁을 위해 조일신이 벌인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이로인해 기황후에게 위협을 느끼고 조일신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발표를 했고 조일신을 죽인다. 그렇게 기황후에게 충성을 보이며 한보 물어났다. 

 

1351년 5월 18일 개혁 3가지

당시 기황후와 더불어 기철, 권겸, 노책 친원파 3명이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원나라 황실에 딸을 보낸 사람들로 딸의 위세를 빌려 권력을 휘두르고 했던 자들이다. 그들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졌고 조일신의 난 이후 몸을 사리던 공민왕의 인내가 끝에 다다르고  1351년 5월 18일 공민왕은 궁궐 잔치를 한다며 이들을 초대해 격살했다. (=땨려 죽였다) 

 

 

두 번째는 '정동행성 이문소'라는 관청이 있는데 고려법이 아니라 원나라법으로 처리는 하는 이상한 기관이었다. 그러다보니 친원파들이 모인 집합소가 되어 정국 운영에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공민왕은 정도행성 이문소를 폐지한다. 

 

 

원나라가 고려에 둔 통치기구 쌍성총관부를 탈환한다. 이 세가지를 하루에 한 것이다. 98년 동안 계속된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던 시작점이 되는 날이다. 

 

거사 3년 후 1359년 아주 추운 겨울날 홍건적 약 4만여 명이 고려를 침공한다. 홍건적 300여명만 살아서 도망칠 정도로 저지에 성공한다. 그러나 2차 침입때 무려 10만여 명이 침입을 했고 이때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는 수도 개경을 버리고 안동으로 피신해갔다. 그러나 불과 1년만에 홍건적을 몰아내고 개경 탈환에 성공한다. 이 홍건적을 수복하는데 일등공신이 이성계였다. 

 

공민왕의 위기 

개경으로 복귀전에 공민왕은 흥왕사에 잠시 머물렀는데 이때 한때의 군인들이 나타나 공민왕 암살 시도를 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후 기황후는 공민왕 폐위를 내렸으나 고려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기황후는 고려를 침공하는데 2년이 걸렸고 1만여명의 군사를 어렵게 모아 고려로 쳐들어온다. 이때 개경에서는 최영, 함흥에서는 이성계가 철벽 방어를 했고 1만 군대를 격파했다. 그래서 공민왕은 폐위의 위기를 벗어나 안정된 정치를 하게 되는 상황이 왔다. 그리고 결혼 15년만에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사이에 아이가 생긴다. 그런데 노국공주와 아이가 함께 난산 끝에 사망한다.이에 공민왕은 슬픔에 빠져있는다. 

 

 

 

 

 

 

신돈과 함께한 개혁 정치 

노국공주가 사망하고 공민왕은 신돈을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다시 개혁을 단행한다. 권력 집단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인재를 등용한다. 또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토지와 신분제도를 개혁한다. 불법 소유한 토지의 원상 복구와 노비가 된 농민들의 신분을 회복시켰다. 성균관을 세워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등을 교관으로 채용해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했다. 인재양성을 강화시키며 성리학을 발전시킨 교육개혁이었다. 공민왕은 신돈을 정치적 방패로 내세워 개혁을 했던 것이다.  

 

신돈은 백성들에게는 능력있는 정치가로 비춰졌으나 그 개혁으로 인해 피해를 본 기득권층은 신돈을 요승이라며 공격을 하기 시작하고 <고려사>는  조선시대에 쓴 기록이기에 신돈에 대해 부정적이다.  공민왕도 신돈이 왕이 되려한다, 역모를 꾀한다는 소문에 의심을 품다가 확신이 되어 신돈과 거리를 두게 되고 결국 신돈을 유배보내고 죽인다. 

 

 

 

 

 

 

 

공민왕의 죽음 

그래서 신돈까지 몰아내고 난 다음 자제위를 만든다. 원나라에서 숙위를 했던 공민왕은 그때 왕의 친위부대이자 정치 철학을 공유하며 허심탄회한 토론과 인재 양성 목적의 단체이었을 것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제위에게 후궁들과 동침을 지시하고 심지어 지켜보기까지하는 일을 벌이다가 환관이 임금에게 곧 후사를 얻을것이라고 귓속말을 했다. 이에 공민왕은 그를 죽일것이라고 하고 환관도 알고 있으니 같이 죽일 것이라고 한다. 이에 환관은 살기 위해 홍륜을 찾아가 공민왕 살해 계획을 도모한다. 

 

 

 

이에 공민왕은 만취 상태로 잠이들어 있었고 왕의 침실로 들어가 머리를 골수가 벽에 튈정도로 때려 죽였다고 한다. 공민왕이 시해된 후 그대로 멈춘 개혁 정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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