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2년 초여름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하라고 명한다. 그리고 뒤주가 들어온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뒤주로 들어가라고 명하고 사도세자는 8일 후 뒤주 안에서 주검이 되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500여년 조선왕조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사도의 탄생
사도세자의 탄생은 영조 인생에 큰 기쁨이었다. 그 이유는 영조가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한 아들이였기 때문이다. 당시 영조의 나이는 42세였고 조선왕의 평균 수명이 47세 인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늦은 나이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사도세자가 귀한 이유가 있었다. 영조는 25 살에 효장세자를 얻었으나 효장세자 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첫 아들은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첫 아들을 잃고 7년 만에 기다리던 아들 사도가 태어났던 것이다.
영조는 아들이 태어난 지 15개월 만에 세자로 책봉된다. 조선 역대 최연소 세자 책봉이었다. 세자에 책봉되는 나이가 7~10세 사이였는데 사도세자는 돌이 막 지났을 때 차기 왕으로 선정된 것이다. 그리고 영조는 아들이 세살이 되자 세자시강원을 설립해 조기 교육을 시켰다.
사도세자는 어릴때 부터 영특했고 영조는 이런 사도를 보며 너무 기특해 했고 어린 아들이 너무 이뻐 왕의 처소를 떠나 아들과 함께 잠들기도 했던 영조였다.
영조는 왜 조기 교육에 집착했나?
영조의 1번째 컴플렉스
그것은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영조의 1번째 컴플렉스는 어머니의 출신이었다. 영조의 어머니는 무수리 출신으로 알려진 숙종의 후궁이었다. 무수리는 고려 및 조선시대의 궁중에서 청소 따위의 잔심부름을 담당했던 여종이었다. 조선 역대왕 27명 중 천민의 피가 흐르는 왕은 오직 영조뿐이었다. 어머니 피가 미천한 것은 영조에게 너무나 큰 컴플렉스였다.
영조의 2번째 컴플렉스
영조의 이복 형 경종이 있었는데 죽기 얼마 전까지 식사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병약했는데 영조가 입맛을 돋우라고 간장게장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경종은 영조가 보낸 간장게장을 먹은 후에 사망한다. 그리고 왕이 된 영조는 형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의혹을 끝임없이 받게 된다.
이런 영조가 원하는 후계자의 모습은 완벽한 왕이었다. 그러나 영조와 사도세자 두사람 사이에 이상한 낌새가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영조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진다. 9살이 된 사도는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한다. 이에 영조에게 달려가 휴식을 요청했는데 영조는 이것이 공부하기 싫어서 둘러덴 꾀병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혼냈다.
사도세자의 기질
그리고 영조는 10세가 된 사도에게 다시한번 글공부가 좋은지 물어본다. 이에 사도는 싫을때가 많다고 대답했다. 그후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어려운 질문으로 압박했으며 심지어 신하들 앞에서도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기까지 했다. 공부를 멀리한 아들에 실망감이 쌓였던 영조였다. 영조가 이런 사도세자를 못마땅했으나 이와 함께 사도세자의 기질도 좋아하지 않았다.
15세가 된 사도세자는 청룡언월도를 휘두를 정도로 힘이 장사였고 일찍부터 무예를 좋아했다 . 활 솜씨가 뛰어난데다가 말타기에도 능했던 사도세자였다. 이에 나중에 무예신보라는 무술 교본까지 저술했다. 유교사회 조선은 무보다는 문을 중요시 했고 영조도 학문을 통해 신하들을 압도하길 바랬던 영조였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영조가 바라는 공부보다는 무예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또한 사도세자는 그림과 도교 경전에도 심취했었다.
영조와 사도세자 관계가 멀어진 사건
어느새 아버지의 시선은 싸늘해져만 갔다. 1749년 두 사람의 관계가 한층 더 멀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날은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날로 세자가 처음으로 신하들 앞에서 정사를 보는 날이었다. 방어기지를 옮기는 문제였고 심사숙고 끝에 사도세자가 성진에서 길주로 방어기지를 옮기도록 했다. 그런데 뒤에 있던 영조가 자신에게 묻지 않았다고 하며 사도세자의 결정에 반대를 했던 것이다.
이때 당시 영조가 사도세자를 어떻게 봤는지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한중록에 영조는 "심지어 백성이 춥고 배고픈 거나 가뭄이 들거나 천재지변이 있어도 꾸중 하셨다. 세자의 덕이 없어서 그렇다. 그러므로 세자는 날이 흐리거나 겨울에 천둥이 치면 또 무슨 꾸중을 하실까 근심하고 염려하여 일마다 두렵고 겁을 내셨다. " 이렇게 천재지변까지도 모두 사도세자 탓을 하며 꾸중을 일삼았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병
이 맘즈음에 사도세자는 울화증이 생겼다. 이에 울화증을 치료할 약을 보내달라고 자신의 장인에게 부탁한 편지가 있다. 사도세자는 의대증이라는 병도 있어 옷을 입는 것이 괴롭고 힘든 병으로 사도세자에게 옷을 입히려 했던 궁녀를 죽이는 일이 빈번했고 사도세자에게 목숨을 잃은 이들이 100여명에 달했다.
영조와 정조
이 무렵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자라 영조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고 있었다. 정조는 총명했던 사도세자의 어린 시절과 판박이였다. 이에 영조는 후계구도를 정조에게 물려주려 생각했던 것 같다. 이를 어느 정도 직감하던 사도세자였고 그의 기행은 멈추지않고 여성 기 생들과 어울리며 밤새도록 잔치를 벌이면서 놀았다. 사도세자는 왕실에서는 금지된 행동을 계속 일삼았던 것이다.
사도세자 페세자되다.
그리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사도세자의 친엄마 영빈 이씨가 영조에게 올린 청 때문이었다. 그것은 친아들을 죽여달라는 얘기였다. 모두가 잠든 밤 사도세자는 칼을 들고 영조를 찾아갔었고 이를 전해 들은 영빈 이씨는 다음날 영조에게 이 사실을 고한 것이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데려오게 했고 사도세자는 돌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으나 영조는 자결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자결을 시도했으나 신하들이 말려 실패했다. 그리고 뒤주를 들인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고 그날 자정 사도세자를 폐세자 시킨다.
그렇게 8일이 지난 뒤 영조는 뒤주를 살펴보게 하고 사도세자가 죽은 것은 확인한 후에 뚜껑을 열었다. 영조의 맏아들로 온갖 총애를 받으며 자란 사도세자 였으나. 마지막은 뒤주에 갇혀 끝내 죽음을 맞은 불운의 왕이었다.
그렇다면 영조는 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였을까?
정조가 왕이 되기 위해서는 사도세자를 처벌해야 했는데 사도세자를 사형을 시키면 죄인이 되어 정조의 즉위가 어려운 상황이 되기 때문에 연좌법 걸려 아버지가 죄인인 아들이 왕이 될수 없는 상황이므로 결국 정조를 보호하기 위해 뒤주에 가둬 세자를 죽여야 했던 것이다. 영조 입장에서 조선 왕실의 안정을 택한 결정이었고 조선의 군주로써 택한 결정이었다.
사도세자 뜻
아들이 죽자 영조는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키고 생각할 사 , 슬퍼할 도, 사도:생각하니 슬프다' '슬픔을 잊지 못하고 생각에 잠긴다' 는 사도라는 시호를 아들에게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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