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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조선시대 환관 이야기, 박한종 (청도 운림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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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환관 

조선시대 환관은 왕의 측근으로 엄청난 부와 권력을 누리던 직책이었으나 환관이 되려면 엄청난 고통이 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민에서 양반까지 환관을 꿈꿨다.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환관으로는 박한종, 임우등이 있다. 

환관의 뜻 벼슬 환, 벼슬 관 으로 벼슬하는 관리라는 뜻 외에도 남성성을 상실했다는 뜻이 있다. 조선환관에는 내시라는 이름도 있었다. 

 

고려, 조선의 내시와 환관의 차이

 

고려시대 환관과 내시는 다른 신분이었으나 조선 시대는 내시=환관이 같은 말이 되었다.

 

환관은 궁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 
궁녀들이 하기 힘든 일을 하기도 하고 왕실 사람들은 시중을 들거나 때론 왕과 신하 사이에서 나랏일을 돕기도 했다. 

 


환관이 필요했던 이유는? 
왕의 여자들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궁궐에는 많은 후궁들이 있었고 후궁 이외에도 왕의 여자들인 궁녀도 많이 있었다. 이때 일반 남자들을 들이면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 3의 성인 환관을 활용했던 것이다.  전제군주제의 특성에서 발생했던 직업이라고 볼수 있다.  왕실 여성과 어울려도 왕이 안심할 수 있었던 남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누가 환관이 되는가? 

어릴때 개에게 물려 생식기를 잃은 아이, 태생적으로 생식 기능이 미숙한 이들이 환관이 되었다. 조선시대 환관은 총 140여명이었다가 후기에는 400명 정도로 늘어났다.  선천적 사유가 아니라면  스스로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 환관이 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신체발모수지부모라 부모님이 주신 신체를 훼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고사인척 했다. 

 

환관 채용시험 소환 절차

소환은 정식 환관 이전에 인턴 과정이다. 환관은 10살 전후에 이 소환 과정을 10년 동안 이행해야 된다.  20 살 정도에 정식 환관이 된다. 

첫 번째 단계
신체 검사이다. 맨 처음 환관의 기본 생식 불능 검사를 한다. 

두 번째 
궁중  상식 테스트로 대궐 문에 이름과 갯수. 궁궐, 정각 이름, 궁중 용어 등 기본 상식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세 번째 
인내심 테스트로 코에 흙과 물을 사정없이 넣기도 하는 등 극한 환경에서 버틸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테스트였다. 환관에게 필요한 가장 큰 덕목 중에 하나는 철저한 비밀 유지로 전란 시 적에게 잡혔을 때 왕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들이  고문을 했을 때도 참을 수 있는 인내심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선발된 환관은 처음에 궁궐 청소 잔 신보로 왕을 모시는 일등을 했다.  소환이 되고 나면 선배들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10년을 보내면서 품계를 받는 정식 환관이 되는 기회가 온다. 그리고 다시 신체검사를 한후 생식 기능 불능이 확인되면 정식 환관이 된다. 환관이 절대 먹으면 안되는 음식은 마늘이었다. 왕 앞에서 입냄새를 막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환관의 양기가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환관의 품계와 직책 

종 9품 상원이 가장 낮은 직급으로 왕실의 정원을 가꾸는 일을 했고 환관의 최고 품계 상선은 궁 내 식사 감독을 했다. 심지어 왕의 명령을 받아 지방 수령들이 근무 태도까지 관리했다. 

그러나 환관은 1품이 아닌 2품까지 밖에 올라가지 못했다.  환관은 완전히 좋고 아첨을 잘해 군주를 미숙하게 하기도 하고 혹은 군주의 총명을 가리므로써 나라를 그릇되게 하기도 할 수 있기 때문에 환관의 정치 참여를 막기 위해서 정이품까지 밖에 올라갈 수가 없었다. 

조선 시대 환관 박한종

그러나 이런 환관의 최고 직책인 종2품을 뚫고 종1품까지 올라간 환관이 있었다. 명종때 박한종이라는 인물이다. 박한종은 명종이 왕이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인물로 명종 이전의 왕이 인종이었는데 후계자 없이 몸이 아파서 위독해진 상태였고 다음 왕위를 노리를 형제들과의 싸움에서 박한종은 명종측에 인종의 건강상태를 시시각각 전달하면서 명종에게 알려 즉위에 도움을 줬었다. 


이렇게 박한종은 종1품이 되고 조선시대 왕실 재정을 관리하는 기관인 내수사의 관리가 되면서 박한종의 권력은 하늘을 찌른다. 그는 권력을 이용해 양반과 백성을 괴롭혔고 대신들이 처벌을 간청하면서 그는 삭탈관직을 당하며 궁궐밖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쫓아낸지 얼마안되서 명종은 다시 그를 불러 복직시켰다.  그리고 세자의 교육을 맡긴다.  또한 박한종의 입양한 아들 박세겸 또한 아버지의 권력을 이용해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1553년 명종 즉위 9년째 일이다. 임진왜란 전 경복궁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 경복궁은 아수라장이었다.  온돌에 불을 너무 높여 화재로 이어졌던 것이다. 온돌을 확인하지 않는 이는 박한종이라는 환관이었다.  그래도 박한종은 임금의 선처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수 있었다. 

 

 

환관 족보
아이들 낳을 수 없던 환관은 부인을 들이고 다른 성씨의 아이를 입양해 대를 이어갔고 그 아이 또한 생식기능이 없는 아이였다.  국가에서는 환관 가족을 인정했다.  유교 사회였던 조선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환관에게 양자를 허락해 제사를 지내도록 했던 것이다. 

세계 유일의 환관 족보인 양세계보
환관 족보의 자녀 이름이 모두 다르다.


조선시대 환관을 그린 초상화는 단 두점 뿐이다. 그 중에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운 호성공신 3등의 환관 임우를 그린 초상화이다.

 

환관 임우


청도 운림고택

청도 운림고택은 구한말 환관 상선 김병익이 지은 고택으로 당시 환관의 권세를 알수 있는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