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의 이미지는 현모양처로 가장 많이 떠오른다. 그녀는 조선의 대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휼륭한 아내로 알려진 대표적인 조선의 여성상이다. 그러나 신사임당이 살던 조선 초기 , 그녀는 현모양처로 유명했던 것이 아니였다.
사실 그녀는 유명한 화가였다. 율곡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산수화와 포도를 잘 그렸던 화가로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만 무료 40여점에 이르고 5만원권 지폐 속에서도 그녀의 작품들이 2개나 들어가 있다.
사실 오천원 지폐에는 이미 신사임당의 그림이 들어 있다. 그래서 오만원권 뒷면에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화가 어몽룡과 이정의 그림을 넣었다.
오죽헌
그런데 왜 우리는 많은 그림을 남긴 신사임당을 화가가 아닌 현모양처로만 기억하는 것일까? 신사임당은 1504년 조선의 대표 명문가 평산 신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명화, 어머니는 용인 이씨 사이 5녀 중 차녀로 강원도 오죽헌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율곡 이이 역시 이곳에서 태어났다.
오죽헌은 신사임당 어머니의 집이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남녀 차별 없이 재산을 상속했기 때문에 신사임당의 외할머니가 신사임당의 어머니에게 집을 물려줬던 것이다. 고려시대는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를 갔던 풍습이었던 조선 초까지도 이것이 남아있어서 신사임당의 경우도 그러했다.
신사임당 아버지 신명화는 용인 이씨 집으로 장가를 간거다. 신사임당의 노비는 무려 119명이었고 46500 평의 땅까지 소유했던 강원도에서 내로라하는 부잣집이었던 것이다.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5명의 딸이 있었는데 유독 신사임당의 재능을 지원해줬고 이뻐해서 혼인 후에도 친정집에 살도록 적극 지원했던 것이다.
신사임당 뜻
신사임당은 그녀의 이름이 아니라 사임당의 사임은 10대 때 스스로 지은 호이다. 임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에서 따온 것으로 당대 현숙한 부인의 대명사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래서 신사임당은 태임을 본받겠다는 뜻으로 스스로 호를 사임이라고 지은 것이다.
당은 신사임당이 스스로 붙인게 아니고 후대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여자임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해 안주인이 기거하는 별채라는 의미의 당을 붙인것이다.
본명으로 알려진 신인선은 후대 위인전을 출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이다. 신사임당으로 유명했지만 정확한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신사임당 어린시절
그녀는 일찍 글을 깨우칠 정도로 총명해서 어린 시절부터 시와 글씨를 보며 주변 사람들이 극찬을 했을 정도이다. 1510년 신사임당은 세종 시대 유명한 화가였던 안견 <몽유도원도>를 보여 자신도 화가가 되리라 결심한다. 그녀는 안견<몽유도원도>를 모사를 시작으로 그림 그리는 것에 열정을 가졌다. 조선시대 여성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조선시대 여성들이 받을수 있던 교육은 바느질이나 수놓기 정도여서 그림은 사치에 가까웠던 일이었다. 그러나 신사임당의 집은 부유했기에 아버지 신명화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신사임당을 적극 지원했다.
아버지가 보기에도 신사임당의 그림실력은 출중했고 그녀의 고향 강릉은 풍경이 좋기로도 유명해서 오죽헌에 살며 산수화에 재능을 보였던 그녀였다. 부모님의 지원 아래 10대 후반이 된 신사임당이다.
남편 이원수를 선택한 이유
조선 시대 양반 여성의 평균 혼인 연령은 약 17세였다. 그러나 신사임당은 19세가 되도록 혼인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느날 그녀의 아버지 신명화가 갑자기 혼인을 하라며 그녀의 신랑을 골라왔다. 그녀의 신랑은 이원수로 22세 덕수 이씨로 집안 어른들이 모두 영의정, 좌의정을 역임했던 명망있던 가문이었다. 그러나 신사임당의 신랑감에게는 치명적 단점이 있었다. 학문도 부족하고 관직도 없었으며 이원수의 경제적 상황도 좋지 않았다. 신사임당의 아버지는 신랑감을 고르는 기준은 신사임당이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냐 없냐였기에 남자의 능력이 중요하지 않았고 이원수를 자신의 집에서 살도록 처가살이를 제안했던 것이다.
그리서 이원수와 결혼한 후에서도 신사임당은 계속 오죽헌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신사임당의 그림 솜씨를 알수 있는 일화가 있다. 마을 잔치에 온 여인이 음식 국물이 치마에 묻어 치마가 망가져 울상이 되었는데 그 치마에 묵포도도를 그렸던 것이다.
이렇게 훌륭한 일화를 남길 정도로 세간의 인정을 받았던 신사임당은 시와 예술 그림으로 명성을 쌓아갔다. 신사임당이 결혼한 후 얼마지나지 않은 1522년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가 사망한다. 이원수는 신사임당이 그림 그리는 것을 적극 지지해주었고 이원수와의 사이에 총 4남 3녀의 자식을 낳는다.
신사임당 대표작
'신사임당의 산수화는 안견에 견줄 만다'하는 극찬을 받았다.
또 다른 대표작 초충도가 있다 .집 마당에서 흔히 볼수 있는 풀과 벌레를 소재로 그린 그림으로 신사임당의 초충도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한 선비가 선물 받은 초충도를 햇볕에 말리려 마당에 놓아 둿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닭 한마리가 그림 속의 벌레를 쪼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그림에 구멍이 뚫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송상기의 문집에 기록된 내용으로 이 이야기는 실화일 만큼 신사임당의 그림은 정교했다. 산수화를 주로 그렸던 그녀가 왜 초충도를 그리기 시작했을까?
신사임당이 38살이 되던 1541년 결혼한 지 20여 년 만에 연로한 시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가족은 한양으로 올라간다. 그래서 거대한 자연경관 대신 일상에서 보는 친근한 소재를 보며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고된 집안일과 육아를 하면서도 그림으로 위안을 받았던 신사임당이다.
신사임당이 위안을 받았던 것은 그림 뿐만이 아니였다 바로 그녀의 자식들로 율곡 이이는 13살에 과거에 급제를 해 대학자이자 정치가로 이름을 날렸다. 율곡이이는 과거시험에 무려 9번이나 장원급제를 한 조선시대 유일무일한 인물이었다. 신사임당의 재능을 물려받은 첫째 딸 매창이 있다. 매창은 어머니 못지 않은 그림 실력으로 유명했다. 자녀들의 교육법은 신사임당 자신이 먼저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는 등 자녀에게 모범을 보인 덕일 것이다.
남편 이원수
그러나 이원수는 한량으로 공부보다는 노는 것을 좋아했던 인물로 심지어 바람이 나서 첫째 아들 이선과 또래의 어린 여자로 술을 좋아하고 성격도 포악스러운 권씨였다. 1550년 이원수가 50살이 되던 해 음서제도를 통해 수운판관(한강에서 배로 나르는 물건을 관리하는 관직)이 되어 집을 나가게 된다. 이 무렵부터 신사임당의 건강이 안좋아진다. 이에 사임당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재혼을 하지 말라고 이원수에게 부탁을 한다. 그 이유는 사임당이 죽을 때 막내아들의 나이는 고작 10살이었다. 그리고 신사임당은 1551년 5월 17일 4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이원수는 신사임당이 죽고 얼마 뒤 권씨를 첩으로 들인다. 심지어 아들이 있는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기까지 한다. 어머니가 죽자마자 첩을 들이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자식들의 심정을 어땠을까? 그래서 일까 큰아들 이선은 권씨와 마주칠 때마다 싸웠다. 율곡 이이는 애정을 담아 가족들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남겼는데 율곡 이이가 애정 어린 글을 남기지 않는 한 사람이 바로 아버지 이원수였다.
신사임당이 죽고 10년 후 이원수는 가족에게 외면받으며 세상을 떠났다. 신사임당이 사망하고 108년이 지난 1659년 잊혀진줄 알았던 그녀의 그림이 다시 알려기게 된다. 조선 후기의 학자 송시열이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우연히 보고 그녀의 그림실력을 극찬하는 글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는 숨은 뜻이 있었다.
신사임당은 여자가 꿈을 펼치기 어려운 조선시대에 재능을 펼쳤던 시대의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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