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까지도 명절이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유교로 부터 시작된다. 조선의 이데올로기가 유교이고 현재까지 많은 유교 관습이 남아있다.
유교란 무엇인가?
유교는 종교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사상가 공자가 체계화하고 설파한 사상을 유교라 불렀다. 원래 공자의 사상은 학문으로 유학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공자를 성인으로 숭상하고 제사를 지내면서 종교적 의미를 내포한 유교라는 단어를 쓰기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유교는 학문인 유학에서 시작된 것이다.
공자가 유학을 만든 이유는 공자가 살던 춘추전국시대는 계속된 전쟁으로 극도의 혼란 상태였다. 백성들은 고통받고 도덕과 정치 모두 무너진 상황이었다. 이때 공자가 인간답게 살려면 각자의 본분과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사상을 담아서 혼란한 사회를 극복할 윤리부터 정치까지 체계화해서 일종의 철학, 학문을 세운 것이다. 이런 사상을 담은 유교는 공자가 죽은 후에도 많은 제자들이 뜻을 이어 나가 중국의 중심 사상이 된다.
그렇다면 중국의 유교가 어떻게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자리잡았나? 사실 유학은 조선시대에 처음 들어온 건 아니었다. 오래전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에 들어와 있었다. 당시 유교는 일부 귀족 계층이 배우던 학문으로 고려시대까지는 생활 양식은 전통 관습과 불교식 생활 양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려말때 새로운 유학이 한반도에 들어와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유학을 받아들인 이유
13~14 세기 고려후기 당시 원 간섭기를 거쳐 외세의 침략과 부패한 정치, 불교마저 타락하며 고려 말의 분위기는 혼란했다. 그러다보니 당시 고려 귀족 지식인 중에서도 개혁이나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고려 지식인 계층 중 유학을 다녀온 이들이 신유학인 성리학을 들여온 것이다.
성리학이란 유교의 한 계통으로 공자를 계승한 후학들이 계속해서 나타났고 시대에 따라서 해석을 추가하면서 유교의 한 분파로 나온 학문이다. 학문의 성격이 성품 성, 다스릴 리를 강조한 것으로 주자가 창시했기에 성리학을 주자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교의 갈래인 성리학으로 당시 시대 상황을 반영한 최신 학문이었다. 그래서 고려말 지식인들은 당대 최신 선진학문인 성리학으로 고려를 바꾸려고 했고 이것에 동의한 사람들이 많아져 무리를 이루어 신진사대부가 형성되었다. 신진사대부의 대표적인 사람이 온건개혁파 정몽주와 급진개혁파 정도전이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무르익던 고려 말 1392년 정도전으로 중심으로 한 일부 신진사대부가 태조 이성계와 손을 잡고 조선을 건국한다. 태조 이성계는 신진사대부와 함께 걔국을 하면서 조선의 국가이념을 유교라고 선포한다.
조선시대 유교를 선택한 이유
그러나 성리학이 너무 복잡하고 심오하여 일반 백성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고 고민끝에 조선초기에는 가장 필요한 유교적 덕목부터 강조하기 시작한다. 조선 유교의 핵심 덕목, 인간관계를 맺는 핵심 원리는 옳을 의, 의리였다. 그래서 당시 최고의 욕은 의리없는 놈이었다.
의리가 없다는 의미는 인간으로써 당연히 갖추어야할 기본 도리인 의를 갖추지 않았다는 의미로 인간이 아니라는 욕이다. 그러나 왕조가 교체가 되었기 때문에 양면성이 존재하게 되고 고려 왕을 바꾸는 순간 의리 문제가 걸리게 된다. 그래서 건국 초에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을 의리없는 놈들이라고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개국 세력들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고 보니 조선의 안정화를 위해 의리가 다시 필요해졌던 것이다. 고려를 등진 건국 세력은 다시 의로움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의리를 어떤 방식으로 실천해야 하는지를 설정했다. 의리를 지켜야 할 최고 대상을 충, 효로 정해준 것이다. 바로 임금과 부모였다.
이렇게 조선은 의리와 충효를 강조한 유교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개국 6년 후 1398년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왕자의 난이 일어났던 것이다. 왕자 이방원이 왕인 아버지를 상대로 권력 찬탈을 도모하는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는 효와 충을 모두 뒤엎는 반란이었다. 이방원의 반란 이후 이성계는 정종을 왕으로 세우고 물러난다.
개국 6년 만에 왕자의 난으로 이성계가 통치이념으로 세운 유교의 덕목인 충효를 완전히 부정당한 것이다. 이후 이방원은 조선 3대왕 태종 이방원으로 즉위하게 되고 아이러니하게 태종은 누구보다 조선을 유교화하는 것에 힘을 쓴다. 더 이상의 자신과 같은 반란이 없도록 유교를 철저히 교육시킨 것이다. 그렇게 해서 조선의 유교화는 태종때부터 본격적이고 체계적으로 시작된다. 그래서 조선 초 유교적 인간 만들기의 핵심 서적이 필요했고 그것이 가례였다.
삼강행실도 간행
세종은 삼강행실도를 간행한다. 백성이 배만 부르면 배부른 돼지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고 사람이라면 윤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종이 다스리던 1428년 김화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한다. 김화 사건을 계기로 효를 백성에게 어떻게 알릴지 고민한 세종은 효와 충을 가르치기 위한 윤리서 간행한다. 그것이 삼강행실도로 1434년 평민 백성을 위한 윤리 교훈서를 만든 것이다.
백성들의 공감을 위해서 실화를 모아서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와 중국 서적에서 실제 있었던 충신, 효자, 열녀 100여 명의 사례를 모아 수록한 책으로 삼강은 군주와 신하, 부모와 자식, 부부간에 지켜야 할 세 가지 강령이다. 다시 말해 백성들이 꼭 명심해야될 것 세 가지 충, 효, 정절에 대한 내용을 백성들에게 쉽게 전달하려 했다. 아직 한글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시기로 백성의 이해가 쉽도록 그림과 함께 기록했다.
- 군위신강: 신하는 군주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충)
- 부위자강: 자식은 부모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 효)
- 부위부강: 아내는 남편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정절)
현재는 효가 당연한 개념이지만 이는 교육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효를 당연하게 여기는 지금도 당연하게 지켜지지는 않는다. 효라는 덕목을 지금만큼 교육받지 않았던 당시 백성들은 부모를 학대하는 등 패륜 범죄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었다. 그래서 세종은 백성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과 함께 그림을 그려넣었다. 또한 지방 사또들에게 <삼강행실도>를 주고 백성들에게 그림을 설명하게 한다.
▼ 유교 문화 가례 내용 알아보기 (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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