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항일 투쟁에 앞장섰고 하얼빈 의거로 사형을 당하고 생을 마감한 후 안중근을 만나러 오던 아내와 아이들은 끝내 안중근을 만나지 못한다. 조국에 남아있던 안중근의 가족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져 이후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도움으로 연해주에 자리를 잡게 된다.
두 명의 안중근 남동생 안정근, 안공근은 마지막까지 안중근의 옥바라지를 했고 안중근이 사망한 이후 안중근 대신 집안의 가장 노릇을 했던 차남 안정근은 안중근의 죽음 이후 1910년 중국 상해로 향하고 도산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 상해 임시정부의 의원으로 활동했던 안정근은 임시정부의 북간도 특파원으로 선발돼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나섰고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참전한다.
안정근이 안창호의 최측근이였다면 막내 안공근은 김구의 오른팔이었다. 안공근은 김구가 만든 비밀결사 조직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한인 애국단은 윤봉길, 이봉창이 속해있던 독립운동 단체이기도 한데 이봉창과 윤봉길의 아래 사진을 찍은 장소가 모두 안공근의 집이었다. 극도로 보안이 필요했던 한인애국단의 활동인데 한인애국단의 선서식을 안공근의 집에서 했다는 것 자체가 그 단체에서 안공근은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안중근의 동생들 뿐만아니라 어머니 , 아내, 사촌에 조카까지 안중근 집안 모두가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렇게 안중근 집안에서 건국 훈장이 무려 15명이 나왔다. 한 집안에서 15명이 받았다는 것, 독립운동 명문가인 것이다.
안중근 의사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35 회)
천주교 흑역사 (토마스 안중근 의사 고해성사 거절하다)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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