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과 남촌
북촌 한옥마을의 역사는 100년이 되지 않는다. 북촌이라는 명칭은 조선 시대부터 쓴 명칭이다. 조선시대 북촌은 현재 가회동, 인사동을 포함 현재보다 더 넓었던 지역으로 왕족과 권세높은 양반들이 살던 곳이었다. 근처에 궁궐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는 북촌과 더불어 청계천 남쪽에 남산까지 아우르 지금의 명동, 을지로, 충무로 지역에 남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북촌과 달리 남촌은 권세가 낮은 가난한 선비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때 북촌과 남촌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진다. 1880년대 후반부터 유입되어 남촌에 일본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된 사건 경술국치가 되고 한양의 이름을 경성으로 바꾼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인의 세력이 점점 커지기 시작해 남촌에 일본인 거주지역이 생기게 된 것이다.
당시 북촌 지역에는 조선의 궁궐이 있고 세도가의 집이 많은 북촌으로 바로 들어갈수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 북촌보다 정착하기 쉬운 남촌에 자리 잡았던 일본인들이었다. 이렇게 북촌은 조선인 거주지 남촌에 일본인 거주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가 길어지면서 관공서나 조선에서 일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나게 되고 상대적으로 땅값도 싸고 임금도 저렴한 조선에서 사업을 하려는 일본인들이 우후죽순 들어오면서 남촌지역은 포화상태가 되었다. 1920년대부터 일본인들은 급기야 북촌까지 침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는 북촌을 차지하기 위해 남촌에 있던 관공서를 북촌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또한 경복궁을 훼손하고 광화문을 옮기고 1926년까지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를 경복궁 근정전 앞에 세운 것이다.
북촌에 조선총독부를 시작으로 다른 통치기구와 관사까지 차례로 옮기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니 날이 갈수록 북촌의 땅값이 오르게 되고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약했던 조선인들은 집을 구하지 못하고 밀려나야 했던 것이다. 당시 경성의 조선인 1/4은 집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건축왕 정세권
이런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정세권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정세권은 당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부동산 개발업자이자 건축가였다. 정세권이 경성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은 32살, 1920년대였다. 그리고 북촌에 건양사라는 회사를 오픈한다. 건양사는 정세권의 뛰어난 수완으로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정세권은 북촌지역 만큼은 조선인들이 뭉쳐서 살길 원했고 그래서 일본인들의 북촌 진출을 막고 싶었다.
이에 북촌에 땅을 사서 조선인들을 위한 집을 짓기로 결심한다. 1920년대 후반 북촌 땅 익선동이 매물로 나오게 되고 이곳에는 왕실 종친이 대대로 살던 누동궁이 있었고 누동궁 터는 약 2500평의 크기였다.
개량 한옥과 할부제도 도입
정세권은 이 땅을 매입하고 조선인 마을을 짓기 시작했다. 서민층의 조선인에게 개량 한옥을 공급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인기있던 문화주택 (서양식 주택)이 아닌 전통한옥을 개량한 집을 지었다. 마당을 축소하고 방을 효율적으로 배치 동선을 줄여 편리성을 키운 도시형 한옥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곳이 68채 단지가 있는 익선동 166번지 한옥 마을이다.
그러나 집을 지어도 조선인들은 집을 살 만큼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이에 중류 이하의 계층을 구제하기 위해 집값을 할부로 판매한다. 그러던 어느 날 북촌의 중심가 종로구 가회동 33번지에 1535평의 또 다른 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런데 그 옆 33번지보다 더 큰 땅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 땅은 친일파 민대식의 땅이였고 이 두 부지를 합쳐서 7100여 평의 땅 축구장 3개 크기의 땅을 매입한다.
그리고 익선동 한옥마을에 이어 대규모 한옥마을 재개발 사업을 추진한다. 그렇게 가회동 일대 한옥 마을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정세권은 1930년대 독보적인 부동산 개발자가 된다.
그렇게 정세권은 경성 곳곳에 지은 한옥은 약 6천여 채에 달했다. 정세권은 여러 민족운동에 관여했으나 주도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사업적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수많은 한옥을 지어 민족의 터전을 지키고자 했던 인물이다. 그러던 1942년 11월 어느 날 정세권은 함경도에 있는 홍원 경찰서로 끌려간다.
정세권의 말년
조선물산장려운동을 통해 이극로를 처음 만난 정세권은 젊은 유학파 이극로를 무척 아꼈다. 정세권은 이극로가 한글 사전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조선어학회가 자금난에 허덕이자 집을 지어 번 돈으로 조선어학회를 후원했던 것이다. 또한 1935년 2층으로 된 양옥집을 지어서 조선어학회에 기증했다.
1942년 10월 일제는 우리말과 글을 탄압하려고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불법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때 일제는 조선어학회 후원자들까지 뒤지기 시작했고 후원자 명단에 정세권이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이렇게 체포된 정세권은 가혹한 고문을 받게 되고 55세의 나이에 옥에서 병을 얻게 되었고 옥에서 풀러난 6개월 뒤 다시 한번 경찰서로 불려가서 일제에 치떨리는 요구를 받게 된다. 정세권의 3만 5000평의 사유지를 조선인을 친일파로 전향시키기 위해 만든 단체 '대화숙' 에 조공하라고 강요받게 된 것이다. 결국 정세권은 억울하게 땅을 뺏기게 되고 정세권은 건설사 건양사 마져 건설면허를 취소당하게 된다.
2년 뒤 광복을 맞은 정세권은 조선어학회 동지들과 만나면서 1957년 한글 큰 사전 편찬을 끝까지 지켜본 후 1965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세권은 1990년 정세권은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 에 추서되었다.
조선어학회 우리말 사전 역사 (말모이/조선어학회 사건)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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