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강남의 가장 핫한 장소 압구정이 있다. 이 압구정은 조선시대에도 가장 핫한 장소였던 곳이다. 바로 이곳에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한명회가 살았기 때문이다.
한명회의 권력
조선의 예종은 즉위 15개월만에 사망한다. 모시던 왕이 연달아 죽었음에도 한명회는 다시 부활한다. 그 이유는 예종의 뒤를 이은 왕이 바로 성종 세조의 손자로 한명회의 넷째 딸와 혼인한 공혜왕후였다.
한명회 권력에서 물러나다.
당시 후계자 결정권을 지닌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는 성종의 장인이 한명회라는 점을 감안해서 성종을 왕으로 올렸던 것이다. 세조-예종-성종 3대에 걸쳐 왕을 만든 한명회였다. 그리고 13세에 임금이 된 성종은 성년이 되었기에 어린 성종대신 수렴청정을 했던 정희왕후는 대신들에게 수렴청정을 거두겠다고 공표한다.
한명회 정자 압구정
이때 한명회는 이를 반대한다. 성종이 정사를 돌보게 되면 자신의 권력이 약해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를 지켜본 성종은 한명회에게 분노를 느끼지만 참는다. 그리고 신하들의 상소가 계속 올라오게 되자 자신의 위기를 눈치챈 한명회는 스스로 물러나기를 택한다. 이때가 62세의 나이에 비로소 권력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한명회는 한강변에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한다.
압구정 뜻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한명회의 정자, 압구정이다. 벼슬을 버리고 강가에 살면서 '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는 뜻의 한명회의 호를 따 만든 정자가 압구정이다. 압구정동 지명의 유래는 한명회의 호에서 유래되었다.
압구정 사건
한명회는 압구정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을까? 한명회는 이 압구정으로 인해 큰 문제가 발생한다. 1481년 6월 중국에서 사신이 방문한다. 이때 명나라 사신은 압구정 관람을 원했고 정계 은퇴 후에도 권력을 유지하고 싶었던 한명회는 사신을 압구정에 초대한다. 그리고 왕에게 용과 봉의 형상을 새겨 만든 천막으로 국가나 왕실의 행사때만 사용하는 용봉차일을 빌려달라고 한다.
압구정 정자를 넓게 쓰기 위해 용봉차일을 원했던 것이다. 국가 의례에 사용하는 기물을 한명회가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성종은 사적 공간인 압구정에서 사신을 접대하는 것도 모자라 국가 기물까지 빌려가겠다고 한 것이다. 이에 성종은 한명회의 부탁을 거절하고 대신 접대 장소를 다른 곳에서 열 것이니 거기에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명회는 아내가 아파서 참석 못하겠다고 했고 왕의 명령을 거절했다. 이에 성종은 한명회를 참을 수 없었고 크게 분노하며 한명회의 직첩 부원군을 거두라고 명령한다. 자신의 장인 한명회를 직접 내친 것이다.
한명회 죽음 이후
압구정 사건 6년 뒤인 1487년 73세에 병환으로 사망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였다.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건을 조사하던 시기에 한명회 역시 연루되어 있었으나 이미 사망했던 상황이었다. 이에 연산군은 한명회의 무덤을 파서 부관참시를 했던 것이다.
한때 세상을 호령했던 한명회였으나 그의 권력은 결국 비참한 최후로 끝이 났다. 한명회를 통해 모든 권력에는 끝이 있다. 천하를 손에 쥔 한명회조차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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