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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정치사회

연평도 포격전 : 북한은 왜 연평도를 공격했나?

연평도는 꽃게가 유명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기도 하다.  2010년 11월 23일 서해 5도 연평도 포격사건이 있었다. 휴전이후 최악의 교전이다. 

 

서해 5도 :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서해 5도는 군사적 전략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서해 5도에 해병을 배치하여 북한의 해상 도발을 방어할수 있다. 더불어 북한 공군까지 방어할수 있다. 이 중에 연평도는 북한 강령반도와 12km 거리로 북한과 가장 가까운 섬이다 . 

 

연평도 위치

 

북한의 연평도 공격 

연평도에 떨어진 170여발의 포탄이 떨어지면서 섬 전체가 검은 연기로 가득찼고 민간이 사상자까지 발생한다. 종전 이후 처음으로 민간지역을 겨낭한 공격이었다. 민가를 포격한 전쟁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CCTV를 통해 북한의 연평도 포격 상황이 거의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이때 북한이 목포물을 불태워 없애는 소이탄 포를 발사했다. 이로 인해 산불이 크게 발생 주민들이 거주는 민간인 건물 134채가 파손되었다.  이에 해군은 서해로 함정 및 전투기를 출격시키고 전군 비상에 돌입했다. 

 

연평도에는 해병대가 주둔해 있는데 공교롭게 이날 국군의 포격훈련일정이 있어서 주민들은 처음에 헷갈렸다고 한다. 이곳은 매달 포 사격 훈련이 매달 진행되던 것이어서 북한은 이날을 노리고 포격을 진행한 것이다. 

면사무소 뒤가 포격되는 모습

 

전 세계 언론도 긴급속도를 냈고 당시 외신들의 공통된 반응은 정전협정이 무너졌다는 것이었다. 

정전 협정문

 

 월 1회 연평도 포병 부대가 사격 훈련을 하는데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 이후 남북에서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대북방송을 하겠다고 했고 북한에서는 스피커에 원정 사격을 하겠다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민가의 지붕을 뚫고 떨어진 포탄 모습

 

그리고 이날 북한은 우리군의 사격훈련을 빌미로 포탄을 떨어뜨렸고 연평도에는  을종사태가 선포되며  국군과 북한은 1시간 동안이나 대응사격을 했다. 연평도는 당시 소방소 하나 소방차도 한 대 뿐이었다. 화재 진압을 하기 위해서는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을종사태 선포: 단기간에 수습이 안될 경우 지역 군사령관의 지휘하에 통합 방위 작전을 수행하여야 하는 사태

 

당시 북한에 대응사격을 한곳은 무도였고 북한의 도발 원점 개머리 해안과 4~5 km 떨어진 지점이었다. 그래서 무도의 북한군은 아무생각없이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고 무방비로 포격 당한 후 즉각 사격을 반격했다. 대응사격으로 북한군 2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군의 연평 포격 대응 

* K-9 자주포는 우리나라가 자체 개발한 국산 자주포로 북한 포병 전력에 대응하기 위해 개발했다. 최대 사거리 50km로 당시 연평도에 6개가 있었는데 한대가 불발 , 또한 북한이 k-9 자주포 2대를 명중시켰다. 설상가상으로 탄약고에도 화재가 발생했다. 북한에서 연평도를 향해 170발을 쐈고 우리군은 총 80발로 대응했다.

 

K-9 자주포 연평 포격때 사용 

 

 이때 주민 대피와 자주포 대응시간은 13분이었다. 늦었다는 반응이 있었으나 그때는 빠른 대응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레이더 성능이 그때와 많이 달라 비교 불가. 또한 이때 미국은 우리나라의 보복을 적극적으로 말렸다. 이유는 우리나라는 전시작전권이 없다. 유사시 군의 작전을 통제하는 권리가 주한미군 사령관이 가지고 있다.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한 이유 

2010년 9월 28일 김정은은 북한 정권의 공식 후계자로 공식 석상에 처음 등장한다. 이때문에 사람들 앞에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강력한 한방이 필요했던 시기이다. 김정은이 생각했던 것이 연평도 포격이였던것 같다. 아버지 김정일은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군경험이 전혀 없었으나 아들 김정은은 김일성 군사 종합대학에서 포병학을 전공했기에 연평도 포격을 직접 진두지휘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