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선거에서 공화당이 다수당이 되면서 3선 개헌에 대한 불씨가 일기 시작했다. 김종필은 자신이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날벼락 같은 3선 개헌 논의가 시작된 것이다. 이에 박정희은 2인자의 배신에 화가 났고 JP 지지자들은 공화당에서 이미 제거 대상이었다. 박정희는 김종필을 회유했고 자신의 지지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김종필은 박정희의 국무총리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 그러나 허울뿐인 권력에 불과했고 김종필은 이렇게 만연 2인자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JP의 합류로 3선 개헌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김영삼 초산 테러
이에 김대중은 3선 개헌 반대 투쟁을 했고 김영삼 또한 3선 개헌 반대 시위를 했다. 이런 중 김영삼 자택 앞에서 초산 테러가 발생한다.
여당은 결국 야당을 따돌리고 투표장소를 이동해 몰래 자신들만 투표후 3선개헌을 통과시켰다. 박정희의 장기 집권에 맞서 정치개혁이 절실했던 야당이었다.
이때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주장했다. 40대의 젊은 정치로 세상을 바꿔보자는 내용이었고 그래서 김대중과 김영삼은 당내 대선후보에 출마하게 된다. 당연히 초산테러와 당내 인지도가 김영삼이 높았기 때문에 당연히 김영삼이 될줄알았으나 예상과 다르게 김대중이 되었다.
김영삼은 경선 결과를 수용하고 김대중 유세를 끝까지 도왔다. 이때 김영삼은 선거대책위원장 같은 주요직책을 줄것으로 예상했으나 아무얘기가 없었다. 그게 쌓이고 쌓여서 신뢰가 무너진것이 아닌가 싶다. 이후 두 사람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김대중 의문의 사고들
이후 김대중과 박정희의 경선이 시작되면서 김대중에게 의문의 사고가 많이 일어났다. 김대중 자택에 폭발물 사고도 일어났고 야당 선거대책본부장의 집에 화재 발생, 유세 다니던 중 김대중의 교통사고를 겪었다. 이 사고로 목숨은 건졌으나 한쪽 다리를 절게 되는 사건이었다. 이때부터 YS와 DJ는 정치계의 거목으로 각인되었다. 그리고 제 7대 대통령 선거결과는 박정희의 승리였다.
이후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실시한다. 이때 김영삼과 김대중은 모두 해외에 있었다. 김영삼은 하버드 대학 초정 강연으로 미국에 있었고 김대중은 일본 병원에서 다리 치료를 받던 중이었다. 이때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을 상대로 싸우겠다고 바로 귀국하고 김대중은 해외에 남아 망명하여 반유신 활동을 이어간다.
김대중 납치사건
그러나 중앙정보부의 계속된 감시로 외국도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1973년 8월 8일 김대중 일본 호텔에서 납치가 된다. 그리고 김대중은 실종된다. 그리고 갑자기 동교동 자택에 나타난다. 김대중의 회고록에 의하면 옆방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김대중을 납치 기절시킨 후 자동차에 실어 오사카에서 배를 태워 바다에 빠뜨려 수장시켜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박정희 정부에 압력을 가해 김대중을 다시 한국으로 와서 동교동에서 풀어줬다는 것이다.
김영삼 제명 사건
김영삼은 유신헌법 시기 돌아와 야당 신민당 대표를 맡아 민주화를 외치며 독재정권 아래 갖은 시련에도 끝까지 투쟁한다. 이런 YS가 거슬리던 박정희는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시키기까지했다. 이에 김영삼이 했던 말이 있다.
결국 이로인해 야당의원들은 대부분 사퇴를 하고 이것이 부마항쟁- 1979년 10.26사건까지 오면서 유신정권의 막을 내리게 한 계기가 되었다.
신군부 집권 고난의 김영삼 김대중
김대중 사형선고
이후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신군부 세력이 집권하게 되고 1980년 9월 전두환이 제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이후 대통령 간선제, 언론통폐합 등이 실시되었고 김대중은 국가내란 음모 조작사건으로 구속된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배후 조종하였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때 김영삼은 강제적으로 정계를 은퇴하게 되고 가택 연금된다. 김종필은 신군부에서 연행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집중수사받게 된다. 온갖 수모를 겪고 미국으로 도피하게 된다.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고 곧 죽을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미국의 적극적인 구명 운동으로 1982년 12월 형 집행정지로 출소 후 미국으로 망명한다.
김영삼 단식투쟁
한편 가택연금된 김영삼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23일간 단식 투쟁에 돌입한다. 이때 김대중은 미국에서 연설을 통해 김영삼의 단식을 지지했고 위싱턴 한국대사관에서 백악관까지 가두행진을 했다. 이로 이 둘은 다시 연대를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1987년 민주화까지 가는 아주 중요한 흐름의 시작이자 마지막 개헌의 시발점이었다. 전국에서 들끓는 사회적 개혁 요구에 학생들의 시위도 격렬했고 박종철 열사의 고문 치사사건은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거리에 나와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게 만들어 6월 민주항쟁의 시작이었다. 6월10일 국민대회 하루 전날 이한열 열사 최루탄 피격사건이 발생했고 이한열 열사의 희생이 기폭제가 되어 6월 26일 국민평화 대행진 때 전국 34개 도시에서 100만 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결국 이는 신군부의 몰락을 이끌었다. 이렇게 다시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된다. 그러나 야권의 김영삼, 김대중의 단일화 후보가 결렬되면서 따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되고 김종필도 미국에서 들어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된다.
보수와 진보 정치구도 전환점
비록 역대 최저 득표율 40%가 안되는 투표률로 당선이 되기는 했으나 군사정권 시기 2인자였던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후 국회는 4개 정당으로 나누어지면서 어느당도 주도적으로 할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때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3당 연합을 한다. 이로써 거대 여당 자유민주당이 창당되면서 이후 보수와 진보 진영의 정치세력 구도로 바뀌게 된다.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한민국 현대사 정치 중심에 있었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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