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사회 변화
이자겸은 인주 이씨로 혼인관계를 통해 고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외척으로 등극했다. 이자겸은 인주 이씨로 지금의 경기도 인천이 본관을 고려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세력을 키운 외척 세력이다.
고려 16대 왕 예종의 장인이자 17대 왕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으로 그 힘을 업고 왕을 몰아내려고 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1126년 고려의 17대 왕 인종이 내시를 불러 이자겸과 척준경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자신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인 이자겸을 숙청하라고 명을 내린 것이다. 인종잉 먼저 이자겸을 제거하려던 것으로 외손자 인종에게 공격받고 이자겸이 방어한 것인데 교과서에는 이자겸의 난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종이 왕위에 오를때가 14세였다. 그래서 인종을 대신해서 16대 왕 예종의 형제들이 거론되었는데 이자겸이 자신의 어린 외손자를 왕위에 올리는데 성공한 것이다. 어린 인종은 외할아버지 이자겸 덕분에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래서 이자겸이 인종이후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후 이자겸의 아들들과 일가 친척들의 권력 남용으로 백성들을 괴롭혔고 재산을 늘려나갔다. 원주 법천사 터에 가면 거북이 모양에 왕자가 세겨져 있다. 고려 지광국사 부도탑비로 지광국사는 이자겸과 인척 관계이다. 보동 귀부에는 부를 상징하는 '만'자를 많이 새기는데 이 씨가 왕이 된다는 설을 믿었던 인주 이씨는 이자겸이 왕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새겨 넣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고려 시대의 절은 일반적인 종교시설이 아니라 정치, 종교, 가문이 얽혀있는 곳이다. 이렇듯 이자겸의 권력에 대한 욕심은 도를 넘었고 이에 인종은 신하들의 만류에도 이자겸을 제거하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1126년 2월 왕실부대는 이자겸의 측근 척준경의 동생과 아들을 살해한다. 이 소식을 들은 이자겸과 척준경은 군사를 동원해 반격에 나섰다. 이자겸의 아들 의장이 이끄는 현화사 승려 300여명이 합세해 궁궐을 포위했다. 가족들의 죽음에 분노한 척준경이 궁궐을 방화 후 공격한 것이다. 간신히 피신을 한 인종이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이사겸에게 선위 의사를 표명한다.
그러나 이자겸은 선위를 거절한다. 이자겸은 부정부패를 일삼던 권력의 핵이였으나 이성계만큼의 지지세력이 있지는 않았던 것같다. 이자겸이 왕위를 받지는 않았으나 인종의 왕권은 약화되었다. 궁궐이 불타버렸기 때문에 인종은 1126년 이자겸의 사저에 거처하게 된다.
척준경은 누구?
척준경은 고려시대 곡주 지금의 황해북도 곡산군 사람으로 향리의 아들이었다. 집이 가난해 공부를 못해 무뢰배와 어울렸고 1107년 윤관이 여진을 정벌할 때 윤관을 구하는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그 공으로 고속 승진을 하게 되고 이자겸의 아들과 척준경의 딸이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자겸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한다.
이자겸과 척준경의 갈등
1126년 이자겸 아들 종과, 척준경 아들 종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다. 이자겸 아들 이지언의 종이 척준경을 비난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가 치민 척준경은 이자겸에게 등을 돌린다. 인종은 척준경의 아들과 동생을 죽인 일에 대해 사과하고 척준경을 이용해 이자겨을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척준경의 배신
인종은 이자겸이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는 서신을 인종에게 받고 인종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고 척준경의 배신으로 이자겸이 패배하며 소복차림으로 인종에게 죄를 청하게 된다. 이자겸의 아들, 처 그 휘하 세력들은 모두 유배를 가게 된다. 인종에게 시집을 갔던 이자겸의 딸 둘은 패비가 된다. 이자겸은 전남 영광 유배지에서 1126년 12월 유배 7개월 만에 숨을 거둔다. 이자겸을 몰아낸 후 척준경은 긴 관직을 받지만 정지상이라는 고려 문신에게 1127년 이전에 궁궐에 불을 지른 건으로 탄핵을 받아 엄타도로 유배 보내지고 얼마뒤 고향 곡주로 옮겨지게 된다.
이자겸과 영광굴비
유배지 영광에서 생선을 맛있게 먹은 이자겸이 비록 귀양온 몸이지만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으로 생선 이름을 굴비, 굽힐 굴, 아닐 비 라고 이름지었다는 설이 있다. 원래 굴비는 조기이다.
태조~목종 호족의 시대 , 현종-문벌 귀족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자겸의 난 무렵 고려 왕실과 문벌 귀족의 대립이 나타나면서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가져오게 되고 10년 후 묘청의 난 무신의 난 등으로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이자겸의 난은 고려 전기 사회의 중요한 고비가 되는 사건이었다.
[이자겸의 난 쉬운 글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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