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 가면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 동상 옆에 한글을 지키신 분들을 위한 기념탑이 있다. 조선어학회 탑이다.
말모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만든 주시경 선생은 한가지 소원이 있었다. 우리말 사전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주시경 선생은 우리말이 사라질수 있는 위기감을 느꼈고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말과 글로 쓰인 사전이 필요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전 편찬은 민족 정체성과 독립을 위한 길이라고 믿었던 주시경 선생이었다. 그렇게 1911년 조선어 사전 편찬을 그의 제자들과 계획한다. 이때 만들려고 했던 사전의 이름이 ‘말모이’였다.
그러나 사전 제작은 4년만에 중단된다. 1914년 주시경이 돌연 사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5년이 흘러갔고 1929년 조선어 사전 편찬 작업이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조선어연구회
1921년 주시경의 제자들이 조선어연구회를 만들어 사전 작업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사전 편찬을 주도했던 인물이 이극로였다. 독일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던 엘리트로 그가 조선어연구회를 찾아왔다. 그는 유학시절 아일랜드인들이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영어로 된 간판과 표지판이 곳곳이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이에 언어 독립 운동을 결심했던 이극로였다.
조선어학회 활동
이극로가 들어오고 조선어연구회는 조선어학회로 개명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전국 각도의 사투리 수집을 위해 학생들의 도움을 받았다. 방학 시간 동안 고향으로 내려가 각 지역의 방언 수집 과제를 낸 것이다. 1935년부터 1만여개의 단어를 모을수 있었다. 그후 표준어 선정 회의를 거쳐 1년 9개월 만에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집을 편찬한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전국 각지에서 제멋데로 쓰던 우리말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표준어를 결정한 것이다. 이 표준어에 한글 맞춤법 표준안을 만들고 외래어 표기법 표준안도 만들었다. 이렇게 세 가지를 가지고 우리말 사전을 만들어낸 것이다.
일제의 감시
1936년 10월 28일 표준말 모음 발표회를 진행한다. 의미깊은 행사의 축사를 맡은 사람이 도산 안창호였다. 그런데 이 현장에 일제의 경찰이 들이닥쳐 행사가 중단이 되었고 이후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감시를 강화했다.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대표로 다음날 종로경찰서에 출두하게 된다. 그리고 일제 경찰에게 본심을 감추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당시 만들고 있는 사전 편찬을 위해 일제가 원하는 말을 해서 슬기롭게 넘어갔던 것이다.
조선어학회의 수난
그러나 조선어학회의 수난은 지금부터였다. 일제 경찰은 매일같이 조선어학회 사무실을 드나들면서 감시를 했던 것이다. 결국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남산에 세워놓은 조선 신궁에 나가 참배도 올리고 국민정신총동원 연맹이라는 친일 단체에 가입까지했다. 오직 사전 편찬을 위해 굴욕을 참아야 했다.
조선어학회 사건
그런데 1942년 3월 함경남도 한 기차역에서 박병엽이 일본 경찰을 만나게 되고 일본 경찰의 누구냐는 말에 박병엽이라고 조선말로 대답을 한다. 당시는 창씨개명을 했던 때로 조선말 쓰는 것도 금지였다. 이에 경찰은 박병엽의 집을 수색하게 되고 조카 박영희의 2년전 일기장에 적힌 국어를 사용하다 혼났다는 내용을 보고 당시 선생님이 누구인지를 추궁, 그 선생님은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정태진이었다. 이에 정태진은 경찰에 불려가 20일 동안 고문을 받게 되고 결국 이렇게 자백을 한다.
이제 이들은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회원의 퇴근길에 그들을 체포했고 이때 사전 작업 중이던 자료와 조선어학회 회원들 명당 및 후원자들 명단까지 일제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일제는 관련 인사 33명을 검거하게 된다. 이들은 끌려가자마자 모진 고문을 끊임없이 받았고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한징과 이윤재가 옥중에서 숨을 거둔다.
조선어학회 회원들 석방
원하는 대답을 받기위해 재판도 받지 못한 채 2년간 옥중에서 고문을 받았고 재판에서 다룬 그들의 죄목은 내란죄였다. 이에 회원들은 6년의 징역형을 받게 되고 모두 유죄로 징역형을 받게 된다. 이를 받아들일수 없었던 회원들은 다시 재심을 청구 7개월 뒤 받은 판결은 다시 유죄였다. 그런데 어느날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석방이 된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하게 되고 이틀 뒤 8월 17일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석방이 된 것이다.
사전 원고는 어디에?
그러나 이들이 찾아야 할 것이 있었다. 사전 원고였다. 다시 찾은 조선어학회 사무실에서는 사전 원고를 찾을 수 없었다. 광복 24일 후 사무실로 전화 한통이 걸려온다. 경성역 역장에게 걸온 것이다. 경성역 창고에 조선말를 풀이한 원고뭉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사전원고를 찾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경성역에 원고가 있었던 걸까? 그것은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재심청구때문이었다. 재심을 위해 필요했던 사전 원고를 광복이되면서 경성역에 방치했던 것이다.
한글학회- 국어사전 시작
그리고 드디어 18년 만에 조선말 큰 사전 1권을 출간하게 된다. 이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꾼 조선어학회는 1957년 전체 6권의 큰 사전을 완간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국어사전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북촌에 가면 조선어학회 터가 남아있다.
한글 어원 및 한글 이름은 누가, 언제 만들었나? 24-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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