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 표류기는 유럽에서 조선을 본격적으로 알린 최초의 책으로 네덜란드인 하멜이 낯선 조선 땅에서 보낸 약 13 년간의 표류 생활이다. 17세기 조선 제주도를 그린 이 그림은 외국에서 쓴 헨드릭 하멜이 쓴 하멜 표류기에 있는 그림이다.
하멜일행 제주도 표류
1653년 8월 23살 하멜을 포함 총 64명의 네덜란드 선원들은 바다를 항해하던 중 태풍에 휩쓸려 암초에 부딪혀 배가 산산이 부서졌다. 얼마 후 살아남은 하멜은 조선의 제주도에 표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하멜은 자신의 동료를 찾았고 64명 중 36명만 살아남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얼마뒤 멀리서 말총을 짠 모자를 쓴 조선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들도 하멜을 보고 그냥 돌아가버렸다. 그리고 표류 3일차 되던 날 1~2천여 명의 군사들이 들이닥쳐 목에 쇠사슬을 채우고 이들을 어디론가 끌고 갔던 것이다. 낯선 외국인들의 등장에 관군들이 그들을 생포한 것이다.
당시 조선은 중국 일본 같은 동아시아 인과의 만남은 자주 있었는데 서양인과의 교류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조선인과 하멜일행은 서로를 낯설게 봤던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퀠파르트로 불린 제주도는 하멜에겐 난생처음 온 미지의 땅이었다.
하멜 일행이 일본을 가려했던 이유
제주 목사 이원진 앞으로 끌려간 하멜 일행. 이들은 말이 통하지 않았고 하멜일행은 야판과 낭가사기만 외쳤다. 야판은 일본, 낭가삭기는 나가사키였다.
하멜일행은 왜 일본 나가사키로 가려고 했나? 이들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소속된 직원들이었다. 그래서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고 당시 네덜란드는 중계무역으로 큰 이득을 남기고 있었고 특히 일본과 교역이 많았던 이유는 당시 국제 무역의 결제 수단으로 은을 사용하고 있었고 은의 세계적인 생산국이 바로 일본이였기 때문이었다.
동남아와 중국 제품을 매입해 일본에 팔아 은으로 받은 후 받은 은으로 아시아의 향신료 등을 싸게사서 유럽에 되파는 구조였다. 이렇게 일본의 은을 통해 간접교역을 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였다. 이렇게 회사의 거점지 자카르타에서 출발한 배는 타이완을 거쳐 나가사키로 향하던 길이었는데 제주도에 표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박연 (조선 최초로 귀화한 서양인)
제주 목사는 왕에게 보고하고 하멜일행을 따뜻하게 대해준다. 그리고 조선의 언어를 알려줬고 표류 2개월 차에 한양에서 박연이 이들을 살피러 온다. 박연은 하멜과 같은 네덜란드 사람이었다. 박연은 1627년에 무역을 위해 배를 타고 타이완으로 가던 선원이었고 경주 앞바다에서 조선백생에게 잡혀 이후 조선에 귀하해 여생을 보냈던 사람으로 박연은 조선인과 가족을 이루고 1648년에는 무과에 합격해 조선 관료가 되었다. 박연은 조선최초로 귀화한 서양인이었다.
먼 타국에서 고향 사람을 만난 기쁨에 하멜과 박연은 눈물까지 흘렸다. 그리고 하멜은 박연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박연 역시 체류 이후 조선을 떠나겠다는 요청을 했으나 조선이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절망스러운 소식이었다.
효종에게 끌려간 하멜일행
이에 1654년 5월 말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탈출에 실패한 선원들이 곤장을 맞았다. 그리고 왕은 하멜 일행을 불렀고 그들은 험난한 과정을 거쳐 한양으로 이송되었고 1654년 7월 드디어 효종을 만난다. 효종은 소현세자의 동생으로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러갔다가 왕이 된 인물이다.
효종에게 고향으로 돌려보내달라는 하멜일행의 요청을 거절하고 훈련도감에 근무하라는 명령이었다. 훈련도감에는 박연도 근무하고 있었다. 이곳에 근무하게 되면서 한 달에 쌀 44kg을 월급으로 받게 된다.
*훈련도감: 왕의 호위와 수도의 수비를 맡던 곳
남한산성으로 끌려간 하멜일행
1654년 8월 효종은 청나라 사신이 방문한 동안 하멜 일행을 숨기기 위해 이들을 남한산성으로 보내버린다. 18년 전 청과 병자호란을 치른 이유 외국인의 경우 청나라에 송환하는 것이 관례였다. 박연과 하멜일행을 숨겨뒀기 때문에 외교적 분쟁이 생길 것을 염려해 이같이 행동했던 것이다.
서양인 최초 유배 간 하멜
하멜일행은 몇년 후 청나라 사신이 왔을때 그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하멜일행 중 항해사와 포수가 일터를 빠져나와 청나라 사신을 만나게 되고 이에 조선 조정은 난감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때 항해사와 포수는 감옥에서 절명하고 하멜일행 32명은 유배형을 받게 된다. 조선에 온 지 4년이 된 해였다. 그리고 그들이 유배 간 곳은 전라도 강진이었다. 그들의 유배생활은 양식도 옷도 부족한 비참한 생활이었다. 이에 하멜이 돈을 벌기 위한 방법을 찾아낸다.
하멜의 탈출기
그것은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모험담을 들려주고 돈을 받는 일이었다. 이렇게 번 돈으로 집을 살 정도였다. 그리고 1653년 2월 하멜 일행을 여수 , 순천, 남원에 나눠 살게 하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이에 표류 11년 차에 강진에서 여수로 가게 된 하멜이었다. 그러나 여수 지방관의 괴롭힘에 그들은 조선을 탈출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하멜은 탈출할 배를 사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았고 친하게 지내던 이웃하게 배 한척을 사서 목화를 구해오자고 말해 배 한척을 구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지역의 동료와 함께 총 8명이 탈출을 시도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 탈출에 성공한다. 그렇게 그들은 일본의 고토 섬에 도착한다.
일본에서 난파 경위, 조선 생활 등 자세한 심문을 받느라 1년이나 일본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리고 조섬에 남아있던 동료들도 하멜이 탈출하고 2년 뒤 조선을 떠날 수 있었다. 일본이 하멜의 동료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이렇게 15명의 하멜 일행은 조선을 떠나게 되었다.
하멜 표류기 출판
그 후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보상금을 청구하려고 13년간의 조선 생활과 귀환 과정을 담은 난파 일지를 작성하게 된다. 이 보고서는 하멜보다 먼저 네덜란드에 전해지게 되고 이때 하멜의 난파 일지가 출판사에 들어가게 되고 출판사의 각색을 더해 대중서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하멜 표류기는 유럽이라는 서양에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소개한 최초의 기록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하멜은 하멜 표류기가 출판된 2년 뒤 1670년에 네덜란드에 도착했고 독신으로 살다가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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