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
황제 외에는 출입을 금한다는 뜻의 600년 넘는 역사를 품은 황궁, 어마어마한 규모로도 유명한 곳, 건물 수만 900채가 넘는 축구장 약 72배 세계 최대 궁궐인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이다. 현존하는 세계 최대 궁궐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곳이다. 과거 중국 황실의 상징으로 우리나라의 경복궁과 비슷한 곳이다.
자금성에 조선의 세자가 살았다. 그는 바로 소현세자이다. [1612~1645] 조선 16대 왕, 인조의 장남으로 차기 왕좌에 올라야 했던 소현세자는 왜 자금성에서 살아야했을까?
삼전도의 굴욕
1637년 1월 30일 한겨울 칼바람이 불던 날이다. 모래벌판에 황금색 천막의 단 아래 서 있는 조선의 왕 인조였다. 모래바닥에 무릎을 꿇고 "천은이 망극합니다" 라고 양손을 땅에 대고 큰절을 하는 인조, 머리를 조아리며 치욕적인 항복 의식을 해야 했던 인조였다. 병자호란에서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버티다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완벽하게 패배한 조선이었다.
여진족은 후금이었다가 이후에 청나라로 나라이름을 바꿨다. 조선은 당시 명나라를 섬기며 여진족인 후금을 배척했다. 당시 청나라는 명의 땅을 빼앗으며 점점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명을 완벽히 견제하고자 조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던 청나라이다. 조선은 당시 여진족을 오랑캐로 보고 멀리했고 이에 청나라는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침략 인조를 무릎 꿇게 만든 것이다.
삼전나루
인조 17년 청나라의 요구로 굴욕적인 항복을 비석에 새기게 된다. 소현세자는 정묘호란 정묘년(1627)에 후금이 조선에 일으킨 전쟁과 병자호란까지 겪었는데 그래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소현세자였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나가서 항복을 하겠다고 했으나 청나라는 이를 거부하고 왕이 직접나와 항복할 것을 요구한다.
청나라의 요구조건
또한 조선의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요구였고 인조는 이를 받아들여 소현세자가 청나라로 가게 된것이다. 이때 소현세자에게는 2살 배기 세자가 있었다. 어린 아들과 생이별을 해야했던 것이다. 이때 청나라로 끌려간 사람들은 대신들과 가족, 수행원 , 봉림대군 부부까지 합쳐서 대략 500여 명의 규모였다.
대체 왜 황궁 가까운 곳에 심양관을 마련했던 것일까?
덕성문 안 근처에 소현세자 부부가 살았다고 한다. 그곳의 정식명칭은 심양관으로 청나라에서 소현세자 일행을 수용하려 만든 관소였다. 당시 심양관의 방 갯수는 총 18칸이었다. 업무광간, 세자부부 방 제외 실제 생활공간은 10~13개 정도로 500여명의 사람이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좁았던 심양관이다.
소현세자의 심양 생활
여름철엔 악취가 나고 숨이 막혔던 상황이었고 결국 병에걸려 아프기까지 했다. 전쟁 후 흉년까지 청나라의 충분한 지원은 어려웠을 것이다. 정기적으로 황제에게 문안 인사도 올린 소현세자는 원수 같던 청나라 앞에서 비위를 맞춰야 했다.
소현세자는 조선인 포로가 매매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 자신이 직접 다시 조선인을 사기로 했다. 이렇게 조선인 포로를 속환하려고 노력했으나 아무리 돈을 모아도 일부 포로만 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속환되지 못한 포로들은 비참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청나라 황제는 이제부터 심양관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먹고 생활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그 땅은 농사를 짓기 척박한 땅이었다.
그러나 세자는 조선인 포로들을 이용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농부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성과급 제도로 농장별로 수확량에 따라 차등보상했다. 첫해 농사 결과 3300석이 넘는 양을 수확했고 500여 명이 1년간 먹을 양이었다. 다음해는 첫해보다 2배 가까운 수익을 올리면서 500여명이 배불리먹고도 남을 양이었다. 그리고 남은 곡물을 청나라 사람들에게 비싸게 팔았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포로를 다시 사들였다. 그러는 사이 청나라는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통일을 한다.
조선으로 귀국하는 소현세자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수입된 서양문물을 접하게 되고 당시 급변하는 세상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던 소현세자였다. 청나라 황제가 자금성으로 옮겨오면서 소현세자는 자금성에서 인질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나라 황제는 통일된 청나라이기에 소현세자에게 조선으로 귀국할 것을 허락한다. 청나라에 끌려간지 9년만의 일이다.
소현세자의 죽음
청나라에 끌려갔던 세자가 돌아왔는데 조선에서는 어떤 환영식도 없었다. 그리고 인조는 소현세자를 냉대했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적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귀국 두달만에 학질(말라리아)로 사망한다. 심지어 아들이 죽었는데 인조는 소현세자의 무덤을 찾지않았다. 소현세자 사망 5개월 만에 동생 봉림대군을 세자로 앉힌 인조였다. 분명 소현세자의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현세자의 맏아들 당시 10세였던 세손이 어리다는 핑계로 봉림대군을 세자로 앉힌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세자빈 강씨는 별채에 갇힌다. 세자빈 강씨가 인조의 전복구이에 독약을 탔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세자빈 강씨를 역적으로 몰아 폐위시킨다. 그리고 폐위시킨 그날 사약을 먹여 죽인다. 세자빈 강씨가 죽은 후 남은 손자들도 귀양보낸다. 힘없는 나라에서 아들과 아버지는 권력을 나눌수 없고 그 시대의 아픔을 느낄수 있는 이야기이다.
도르곤 청나라 탄생 목격한 소현세자 심양일기 내용은? 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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