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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

프랑스 혁명 1789년 민주주의 근간이 되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 

프랑스 혁명은 세금때문에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많이 있으나 실제 프랑스 정부 예산에서 왕실 예산은 겨우 5%였다. 그래서 왕실의 사치 때문에 혁명이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프랑스 세금의 70 퍼센트는 국방비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막대한 국방비 지출은 바로 전쟁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때 부터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고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왕정의 부채가 1년 예산의 15배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의 방법으로 세금을 올렸던 것이다. 

 

문제는 앙시앙 레짐 이라는 구체제 사회의 모순이었다.  당시 평민 계급은 프랑스 인구의 98%였고 귀족 성직자 2% 였는데 평민 중에도 돈이 많은 은행가나 높은 관직에 오른 부르주아도 존재했다. 

 

평민이 성직자와 귀족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상징적으로 구체제 사회를 그린 그림.

 

당시 귀족과 성직자는 세금이 면제되는 면세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면세 특권을 누리면서도 재산은 많았다.  2%의 귀족과 성직자가 전체 토지의 무려 40%를 차지하고 있었고 절대 다수의 농민의 몫은 겨우 30%였다. 

 

 

이런 평민에게 세금을 거둬간 사람들이 많았다. 카톨릭 국가였던 프랑스는 교회에 세금을 납부해야 했고 왕이 세금을 징수해갔다. 마지막으로 영주가 또 세금을 거둬갔다. 이렇게 되니 흉년이 들면 굶어 죽는 사람까지 발생했다. 이렇게 프랑스 혁명 전 상황은 가난에 허덕이는 빈곤층이 급증하고 있었고 범죄율도 급증하면서 소송도 증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층에 의해 일어났다. 당시 프랑스는 왕이 관직 매매를 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관료의 수가 많아지면서 왕이 관직 매매률을 올리게 되니 부르주아층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프랑스 혁명은 신분제의 모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브루주아 ( 부르주아 ) 프롤레타리아 뜻 , 의미, 어원, 유래

 

브루주아 ( 부르주아 ) 프롤레타리아 뜻 , 의미, 어원, 유래

부르주아는 11세기경 프랑스에서 처음 사용된 말이다. 부르주아는 부르그(Bourg) 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르그는 도시라는 말이다. 중세 때 부르주아들은 대개 상공업자들이었는데 상공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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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5 단계 

발발- 온건파의 지배- 급진파- 혁명 독재-반동 

 

프랑스 혁명 발발 

처음에 루이 16세는 막대한 국가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귀족들도 세금을 내도록 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의회를 소집했으나 귀족과 성직자는 면세 특권을 잃지 않으려 거부하니 평민 대표까지 모두 모여 175년 만에 삼부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귀족과 성직자의 대표자 투표 대 평민 대표들 1표 투표는 절대 이길수 없는 것이였고 이에 평민들은 국민의회를 만들어 테니스 코트에서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이에 왕은 군대를 동원해 이들을 해산시키려고 했다. 사실상 이 시점이 프랑스 혁명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군대가 몰려든다는 소식을 들은 파리의 시민들은 왕의 군대에 맞서기로 결심하고 7월 12일 군대에 맞서 무장을 시작했고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요새가 시위 군중의 공격을 받고 함락당한다. 이 당시 감옥에는 단지 7명의 죄수만 있었다. 이후 군대가 민중의 편을 들어주면서 파리가 민중 반란군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루이 16세와 그의 측근들은 그날 사냥을 다녀와 안이하게 대응했다. 심지어 7월 15일 왕이 반란군을 인정했다. 루이 16세는 혁명으로 수립된 파리 시 정부를 접견하고 혁명 정부의 관리들은 루이 16세에게 삼색 모장을 선물한다. 이 놀라운 소식이 전국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나라전체가 혁명의 깃발로 뒤덮이게 되었다.

 

온건파의 지배 

혁명에 성공한 파리 국민의회 의원들은 혁명 프랑스를 위한 기본 원칙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789년 8월 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고 이 권리 선언은 온건파의 입법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구상하게 된다. 그리고 이 원칙이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이 된다. 

 

 

 

루이 16세 탈주사건 

이후 사람들은 희망에 부풀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열심히 일하며 새로운 사회가 만들어지길 기다렸다. 그러나 온건파 의원들은 그들에게 조금 더 유리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왕도 또한 자신의 권력에 유리한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니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1789년 10월 1일 베르사유 궁전으로 왕의 가족을 인질로 잡아 데려간다. 이에 국왕 루이 16세는 1791년 6월 20일  바렌으로 야반도주하다 시민들에게 붙잡히게 된다. 

 

온건파 혁명가들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왕이 필요했기 때문에 왕을 처벌할 수가 없었다. 이에 왕이 도망간것이 아니라 납치당했다고 진상을 조작했고 이에 파리 시민들은 샹드마르스 광장에 모여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 수립하자는 청원을 했으나 의회가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총격사건이 벌어진다. 이때 시민 60~70명이 사망하게 되고 이로 인해 혁명 세력은 급집파와 온건파 둘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를 지켜보던 마리앙투아네트의 친정 오스트리아는 1794년 4월 제 1차 프랑스 혁명 전쟁을 일으킨다. 프랑스를 상대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페인까지 참전하여 전쟁을 하게 된다. 이에 프랑스는 급히 의용군을 받게 되고 이때 의용병들의 군가 <라 마르세예즈> 를 부르며 파리로 입성했다고 해서 지금의 프랑스 국가가 되었다. 

 

방데 반란 

전쟁이 일어나니 물자가 부족해지게 되고 이에 혁명 정부는 혁명 독재와 공포정치로 민중의 세금 및 징발을 강제하기 시작했고 이를 프랑스 서부 방데 지역의 농민들이 거부하면서 25만 명 이상이 사망한 방데 반란이 일어난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단두대였다. 

 

** 기요틴 단두대

 

기요틴 단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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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정부는 외세를 내쫓았고 공포정치도 계속했다. 급진파의 대표적 인물 로베스피에르는 혁명 독재의 실권자였고 반대파들은 로베스피에르 타도를 외치며 테르미도르 반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급진파가 몰락하고 국민 공회가 진행되었고 쿠테타 후 선거하고 또 쿠데타를 하고 그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나폴레옹으로 나폴레옹 즉위 후 혁명은 일단락 된다. 

 

**프랑스 혁명 원인과 전개 과정 (삼부회-테니스코트선언-바렌(느)사건-로베스피에르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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