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orean History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는 이유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은 사실 독일이 라인강의 기적을 표절한 것이다.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을 하고 황폐한 도시에서 강대국으로 발돋움을 한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도 독일과 같이 6.25 전쟁 이후 라인강의 기적을 따라 한강의 기적을 이뤄보자고 한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원래 강대국이였고 한국은 식민지였기에 출발 자체가 달랐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우리나라는 최빈국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남한 1인당 국민총소득은 67달러 (1년간 총소득 한화 약 8만 7천원)였다. 현재는 38,000 달러이다. 70년만에 이뤄낸 엄청난 경제성장인 것이다. 피식민지에서 선진국 반열로 일어난 국가는 전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한국전쟁 직후 북한이 더 잘살았다? 

 

한국전쟁 직후는 북한이 더 잘살았다.  일제 강점기에 북한에 공업단지가 밀집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 일제가 남긴 공업단지를 이용해서 북한이 잘 살수밖에 없었다. 당시 북한은 중국,소련이 무상으로 지원을 하고 있었고 한국은 미국이 지원하고 있었다. 이때는 경제 성장을 놓고 남북한은 치열한 대결을 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경제시스템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시스템 중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인지 증명을 해야했다. 2차 오일쇼크로 소련이 붕괴되면서 북한 또한 고난의 행군 시기로 들어갔다. 

 

 

 

1950년 : 전쟁 후 복구 

전쟁 직후 한국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기초 인프라를 마련하는데 집중했다. 당시 경제는 주로 농업에 의존했고 미국의 원조를 받으며 살았다. 밀가루, 설탕, 면 등 모든 생필품을 미국으로 원조받으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원조는 50년대 후반에 끊어졌고 스스로 먹고 살아야 했다.

 

1960년대 : 산업화 시작 

1961년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며 등장하면서 경제 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때 우리는 값싼 노동력이 풍부했기에 무언가를 만들어 수출하기 위한 수출주도형 산업을 육성하려고 했다. 이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었다. 한국 정부는 외환을 벌어들이기 위해 1963~1977년까지 약 8000명의 한국인 광부를 독일로 파견했고 10,000명의 한국 여성들이 독일의 병원에 간호사로 일했다. 당시 광부와 간호사는 독일에서 3D 업종이었다. 이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일하며 외화를 송금하였고 이 외화는 한국경제 성장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1970년대: 중화학 공업 발전 

1970년대는 중화학 공업이 크게 발전한 시기로 철강, 조선, 자동차 전자 산업이 이시기에 크게 성장하였다. 이후 1972년이 되서야 북한과 남한의 경제는 비슷해졌다. 현재 남한의 GDP는 북한의 27배이다. 

 

1980년대 : 경제 자유화

제 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경제 자유화와 금융 개혁이 추진되었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지고 경제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90년 금융위기 

1997년 IMF 외환 위기로 경제 위기를 맞게 된다.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거나 구조 조정을 겪었다. 그러나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인은 놀라운 단결력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 금모으기 운동이 있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금을 기부하는 운동을 벌였다. 결혼 반지, 금목걸이, 금반지 등을 기부하며 국가의 외환보유고를 늘리는데 기여하였다. 

 

2000년 이후 : IT 강국과 지속적 성장 

대기업 삼성, LG 등이 글로벌 IT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며 한국 경제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한강의 기적 비결 

 

첫번째는 냉전 체제 경쟁으로 인한 발전이었고 , 경부 고속도로 건설로 1970년대 반나절 생활권을 완성하였고 이것은 경제 성장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전기, 인터넷, 도로 이것이 90년대에 IT 강국이 되는데도 일조를 한다. 무엇보다 경제 성장을 이루기 전에 시민 의식이 성장, 노동권, 빈부의 격차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