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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이은 일본 유학, 순종이 전국 순회한 이유 황태자 이은 일본인화 고종황제가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강제 퇴위되고 순종이 황제가 된다. 이때 순종의 이복동생이자 황태자 이은을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는데 황태자를 인질로 잡으면 대한제국을 통제하기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또한 황태자의 일본인화는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되어 한일 연대의 상징적인 의미가 되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는 황태자의 스승임을 자처하면서 일본어와 군사지식을 직접 가르치기까지 했다. 이때부터 이은은 일본 황실의 지도 아래 일본식 계몽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때 이은의 나이는 11세에 불과했다. 순종황제 전국 순회 이런 지능적 침략에서 불구하고 의병활동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이토는 대한제국의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회유하기 위하여 이번에는 순종 황제와 함께 전국을 순.. 더보기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암살 영상 공개되지 않은 이유 ->이전글 조선으로 향한 이토 히로부미 러일 전쟁의 중단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최고 서열 원로 이토 히로부미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면서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다시 세력을 키우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는 제국주의 성립을 위해 대한제국으로 향하게 되고 그의 목적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에 이토는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압박해 황제의 승인없이 을사오적에 의해 찬성을 얻었다고 발표하며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로써 한국의 외교권은 모두 일본에 넘어가게 된다. 을사늑약 후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대신하고 내정 장악을 위해 일제가 설치한 통감부의 대표 초대 한국 통감에 취임하게 된다. 한국 통감부 깃발 통.. 더보기
이토 히로부미는 테러리스트였다. (존왕양이 사상이란? ) 일본의 야마구치현은 일본에서 총리가 가장 많이 배출된 지역으로 아베 전 총리, 아베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 등 역대 총리가 68명 중 9명이 배출이 된 곳이다. 일본 장기 집권 총리 1~4위가 모두 야마구치현 출신으로 이곳은 근대 일본 정치사의 뿌리인 지역이다. 또한 일본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도 야마구치현 출신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태어날 당시 지명은 조슈번이었다. 시대적 배경 이토 히로부미가 태어난 19세기 중반 일본은 무사정권이었고 막부시대였다. 이토가 태어난 시기는 애도 막부시대 말기로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당시 농부는 상대적으로 하층 계급이었다. 에도막부시대 가장 상위에 천황이 있었으나 상징적인 존재일뿐 실제 권력은 막부에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출신은 에도 막부 계급의 가장 하층민 농민의.. 더보기
반 고흐 이야기 (별이 빛나는 밤에/감자 먹는 사람들) 반 고흐는 귀를 자른 화가, 비운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뉴욕의 현대미술관에 가면 고흐의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을 볼수 있다. 너무 유명한 작품으로 이 그릠을 보고 영감을 받아 Don McLean 은 빈센트라는 곡을 만들었다. 고흐는 어떻게 화가가 되었나? 고흐는 살아 생전 편지를 많이 주고 받았다. 현재 보존된 고흐의 편지는 900여통이 있고 이중에서 650여통은 동생과 주고 받은 것이다. 고흐의 편지에는 그의 상황과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고흐는 대인관계에 서툴렀으나 이를 평생 받아준이가 동생 테오였다. 편지 속에는 고흐와 가족간의 불화로 이는 고흐가 힘들어 했던 부분이다. 화가로 활동한 기간은 10년정도이나 실제로 화가였던 기간은 5년정도, 나머지 5년은 화가가 되기 위해 학습했던 기간이다. 그.. 더보기
고흐가 귀를 자른 이유? ( 해바라기, 꽃 피는 아몬드 나무 이야기) 이전글 반 고흐 이야기 (별이 빛나는 밤에/감자 먹는 사람들) 해바라기 그린 이유 프랑스 아를에 간 고흐는 화가 협동조합같은 공동체를 만들려고 했다 .이 공동체를 위해 여러 준비를 했던 고흐였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던 중 폴 고갱이 이곳에 오겠다고 수락을 하고 그를 위해 고흐는 방을 꾸미기 위한 해바라기를 그렸다. 그것이 지금의 고흐의 대표작 해바라기이다. 6일 동안 4점의 해바라기를 연작으로 완성했다. 사실 고흐는 전체방을 해바라기로 덮으로 했다. 파리에서 처음 만난 고갱과 고흐였다. 이때 고흐의 해바라지를 보고 고갱이 마음의 문을 열었다. 해바라기를 계기로 두 사람의 신뢰가 시작되었다. 고흐가 귀를 자른 이유 고흐와 고갱의 동거 기간은 2개월 정도였다. 있는 동안 다툼이 많았고 나중에 싸우다 .. 더보기
홍타이지 명.청 전쟁 승리를 위해 이것까지 했다. ->이전글 홍타이지 뜻 누르하치는 1626년에 사망하면서 3명의 아들과 한명의 조카에게 대권을 넘겼다. 대신 4명의 후계자가 공동통치를 하도록 했고 그래도 지도자가 필요하기에 나이와 서열이 가장 낮은 ‘홍타이지’를 '한'로 추대했다. 홍타이지는 누르하치의 8번째 아들이다. 홍타이지는 만주어로 훌륭한 아들이라는 뜻으로 흔한 이름으로 몽골 귀족이나 만주 귀족 중에 홍타이지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다. 홍타이지 정묘호란을 일으킨 이유 홍타이지는 병자호란을 일으킨 인물이고 인조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안긴 인물이다. 권력을 잡은 홍타이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조선을 공격한 일이다. 바로 정묘호란으로 영원성을 홍이포 대포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였기도 하지만 당시 17 세기는 전 세계적으로 소빙하기였기 때문에 평균기온.. 더보기
누르하치 이야기 (후금 ->청나라 세우다 ) [역사저널 396] 누르하치는 만주어로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이다. 금나라는 여진족이 지금의 지린성 헤이룽장성에 세웠던 나라로 건국 후 120년 만에 원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북방의 강자였던 금나라가 원에 의해 멸망 당한 뒤 부족단위로 흩어져 살았고 보호받을 나라가 없었던 여진족은 약탈을 일삼거나 조선과 명에 의존했다. 이런 나라 없는 설움이 누르하치를 보다 강건하게 했을 것이다. 1583년 한 여진족 추장이 명나라에 반란을 일으킨다. 이때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추장을 설득하기 위해 성에 들어갔는데 그때 마침 성을 기습공격했던 명나라에게 반란군으로 오인을 받아서 살해되었다. 누르하치 최고 지도자 되다. 사실 누르하치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돈독하지 않았다. 10살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계모에게 .. 더보기
조귀인 인조가 가장 아낀 후궁 인조는 44살에 얻은 효명옹주를 애지중지했다. 인조는 효명 옹주를 아낀데는 이유가 있었다. 효명옹주 탄생 1년 전 1636년 병자호란이 있었고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심지어 아들 셋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야 했던 인조였다. 27년을 함께 살았던 인열왕후도 전쟁 1년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을 겪고 태어난 효명옹주였다. 이런 효명옹주를 낳은 사람이 조귀인이었다. 조귀인은 효명옹주를 낳기 전까지는 종4품의 숙원이었으나 딸을 낳고 정식 후궁이 된 조귀인이다. 조선 16대 왕 인조의 후궁 조귀인은 인조가 생애에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후궁이다. 조귀인은 누구? 조귀인은 효명옹주를 낳을 당시 일개 후궁이었다. 조귀인의 입궁시기는 1630년으로 인조 즉위 8년째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조는 조귀인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