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썸네일형 리스트형 로뎅의 < 지옥의 문 > 속 생각하는 사람 현대 조각의 아버지 거장 로댕이 자신의 인생을 다 바쳐서 만든 최고의 걸작이 바로 이다. 지옥의 문은 7M정도 되는 거대한 문으로 1880년 프랑스 정부가 실제로 장식미술관의 중앙문 정문으로 만들려고 제작을 의뢰했다. 로댕은 피렌체 산 조반니 세례당의 에 감명받아 지옥을 주제로 제작하게 되었다. 지옥의 문 중간에 프로젝트가 중단이 되었으나 로댕이 작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만들었으나 완성을 지키지 못한다. 1926년 로댕 사후 10주년에 로뎅의 작품을 모아서 지금의 청동 을 만들었다. 지옥의 문에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200여명의 인물이 조각되어 있다. 생각하는 사람 200여명의 인물은 독립상으로 만들어졌고 그 작품들 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이 문 바로 위에 이다. 로댕의 대표작으로 여기는 작품이 인데 지옥.. 더보기 김유신은 어떻게 추존왕까지 되었나? 39회 천년가까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도시전체가 박물관이라 불리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묘는 12 지신이 새겨져 있을 만큼 크고 왕릉과 같은 위용을 자랑한다. 신라의 명장이자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김유신은 가야 왕족 혈통이었다. 가야 출신 김유신 신라 진골되다. 가야는 연맹국가로 금관가야 출신으로 42년 김수로왕에 의해 세워진다. 금관가야는 가야연맹의 초기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성장한 나라였다. 금관가야의 10대 왕은 구해왕(김구해: 재위 521~532)으로 김유신의 증조 할아버지였다. 구해왕이 집권하던 6세기경 금관가야는 위기에 빠진다. 가야연맹은 적국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나라로 영토 확장을 위해 신라는 가야연맹을 공격했다. 구해왕은 신라 법흥왕에게 찾아가 항복을 했고 이를 받아들인 법흥왕.. 더보기 일제강점기 속 최초 크리스마스 씰 (Christmas seal) -셔우드 홀 / 엘리자베스 키스 우리나라 최초 크리스마스 씰 우리나라의 최초의 크리마스 씰을 만든 사람은 셔우드 홀로 한국에서 의료봉사를 하던 로제타 홀의 아들이다. 셔우드 홀은 이모처럼 따르던 박에스터(한국 최초 여의사)마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자신도 부모님처럼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 셔우도 홀이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한 사람이다. 셔우드 홀은 의사가 되기 위해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1928년 황해도 해주에 돌아와 한국 최초 결핵 전문 요양 병원인 해주 구세요양원을 설립한다. 병원 운영을 위해 셔우드홀은 9개의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게 된다. 그 중에 1932년 첫 번째로 발행됐던 남대문 씰이었다. 그러나 처음 크리스마스 씰의 도안 이것이 아니였다. 이순신의 거북선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이순신 거북.. 더보기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유네스코 등재되다.( 크리스마스 휴전 역사)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탄생 배경 오스트리아의 신부였던 요세프 모어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알프스의 작은 성당에서 미사를 들이기 위해 작곡했다고 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과 독일군이 전장 한가운데 대치하던 상황이었다. 1914년 12월 24일은 전쟁 후 첫 크리스마스 이브였고 참호 밖으로 울려 퍼진 익숙한 선율, 독일군 진영에서 시작된 캐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에 반대편 영국군 진영에서 백파이프 연주로 화답을 했고 두 진영들은 서서히 경계를 풀고 노래가 끝나자 영구군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영화는 실화를 토대로 만든 영화이다. 1914년 크리스마스 아침에 독일군들은 펫말을 들고 나와 우리는 당신을 쏘지 않겠다고 했고 영국군도 크리스마스만큼은 전쟁하지 말자고 평화협정.. 더보기 메디치 가문 피렌체 두오모 성당을 !? 그리고 몰락까지 (이전내용) 로렌초 데 메디치 가문이 후원한 예술가 과학자 누구? 70-3 메디치 가문이 있던 시기에 교회의 가장 큰 죄목은 탐욕이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모으는 일, 요구하는 일은 죄악으로 치부했었다. 이에 은행업자, 이자 대부업자들에게 구원을 얻는 방법으로 교회에 기부하라고 했고 메디치 가문도 자신이 지은 죄를 씻고 구원을 얻기 위해 큰 결정을 한다. 두오모 성당 돔 후원 바로 피렌체의 상징이자 랜드마크가 된 두오모 성당에 기부하는 것이었다. 당시 지붕이 없었던 두오모 성당의 지붕을 만드는데 엄청난 후원을 했다. 돔의 지름은 약 45m로 무게 약 2.5 톤을 견뎌내야하는 기술의 부재로 미완으로 남아있던 성당이었다. 그러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돔을 만드는 방법을 생각했고 돔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수.. 더보기 갑신정변 (김옥균 능지처참 왜?) 41-2 이전글 갑신정변 이전 상황 (통리기무아문 별기군 설치, 임오군란) 41-1 1884년 8월 베트남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프랑스사이에 청불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 청나라 군대 절반이 빠져나간다는 것이었다. 이에 김옥균은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1884년 10월 17일 조선의 수도 한성 우정총국(=우체국)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우정총국은 조선 26대 왕 고종은 우편 업무를 담당하도록 세운 근대적 기관으로 10월 17일은 우정총국 설립 축하 연회날이었다. 당시 우정국 총책임자 홍영식을 중심으로 김옥균 민영익 등 조선 고위 관료들과 미국, 영국, 청나라등 각국 외교관들이 한데 모인 연회장이었다. 갑신정변 당일 정변을 계획하면서 김옥균은 .. 더보기 갑신정변 이전 상황 (통리기무아문 별기군 설치, 임오군란) 41-1 1894년 새로운 조선을 꿈꾸며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은 상하이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또한 조선으로 돌아온 김옥균의 시신은 돌아온 후 능지처참을 당한다. 운요호 사건 결과 1875년 일본의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침투, 강화도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1876년 일본은 이것을 빌미로 조선에 개항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렇게 강화도 조약이 맺어지고 이에 조선은 처음으로 부산, 원산, 인천의 항구를 순차적으로 개항했다. 조약 이후 세계 열강들과도 통상 수교를 맺게 되었다. 서양 열강이 조선의 개항을 요구했던 이유는 일본은 대륙 침략의 목적이 있었고 미국은 동북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거점 확보, 청나라는 조선 식민지화, 러시아는 부동항 확보후 아시아 침략 계획이 있었고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목적.. 더보기 로렌초 데 메디치 가문이 후원한 예술가 과학자 누구? 70-3 로렌초 데 메디치 등장 로렌초 데 메디치 (1449-1492) 는 코시모의 손자로 피렌체의 황금시대를 이끈 인물이다. 가문의 위세가 최정점에 올라온 시기 로렌초 데 메디치의 등장으로 현재까지 기억하는 가문으로 성장한다. 할아버지 코시모가 사망하고 병악했던 아버지 피에로마져 사망한후 1469년 겨울, 20살의 나이로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 된 로렌초이다. 사실 로렌초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인물이다. 로렌초는 학문 노래 무술 등 다재다능한 인물이었고 그 중에 가장 뛰어났던 것은 언변이었다. 또한 메디치가 지금껏 명성을 이어올수 있었던 이유는 엄청난 돈을 문화 예술에 투자해서 르네상스 발전에 크게 일조했기 때문이다. 예술에 투자 우피치 미술관 소장품은 메디치 가문에서 미술가에게 의뢰하거.. 더보기 이전 1 ··· 48 49 50 51 52 53 54 ··· 6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