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History/@ Here 썸네일형 리스트형 강화도 외규장각 강화도의 또 다른 역사 유적 고려궁지가 있다. 고려 궁지안에는 조선시대 외규장각이 있는데 조선 정조 때 왕실 관련 서적을 보간할 목적으로 설치된 곳으로 특히 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를 보관하던 곳이다. * 어람용 의궤어람용 의궤 표지는 특별히 비단을 사용하고 종이는 고급 초주지를 사용하였으며 해서체로 정성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선을 둘러 왕실의 위험을 더하였다. 외규장각 복원을 추진하게 된 것은 1991년 서울대 규장각에서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병인양요 당시 약탈된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을 촉구하였고 외규장각 도서반환문제가 대두되면서 외규장각 복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 무엇이 다른가? (의궤의 가치)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 무엇이 다른가? (의.. 더보기 추사 김정희 별장: 백석동천 폐허가 된 별서의 정취... 백석동천은 추사 김정희의 별서로 언제 지어졌는지 알지못하지만 1930년대까지 별장으로 운영되던 곳이다. 그 후 한국 전쟁 이후 잊혀지기 시작했고 이후에 다시 청와대 경호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이곳은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혀졌다. 그러다가 2006년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백석동천은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고 탄핵 심판 기간동안 청와대 안에만 머물러 있던 중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청와대 경호 구역을 산책하다가 이곳을 발견했다. 이때 문화재청장을 불러 이곳을 조사하게 했고 알고보니 추사 김정희의 별서로 밝혀진 것이다. 더보기 흥선대원군 별서 석파정 흥선대원군(1820-1898) 의 호는 석파로 돌석, 언덕 파 돌 언덕이라 는 뜻의 석파정은 인왕산 북동쪽 바위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별장 (=별서)으로 수려한 자연 경관 속에서 그림을 가까이 했던 곳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흥선대원군 난초 그림의 스승으로 흥선대원군이 되기 전에 그림을 좋아하던 이하응이 추사에게 난초를 배웠다. 소수운련암 물로 둥지를 틀고 구름으로 발을 삼은 암자라는 뜻으로 석파정을 짓기전 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는 바위로 바위에 새긴 글귀는 옛날부터 이곳이 아름다웠다는 것을 말해주는 시적표현이다. 원래 석파정의 주인은 철종때 세도가 안동김씨 김흥근이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이 집 빼어난 풍광에 마음에 쏙 든 것이다. 수차례 김흥근의 별서를 매매 제안을 했으나 이를.. 더보기 여수 고소대, 선소 유적 여수는 바다가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여수 밤바다.. ~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전투를 지휘했던 고소대는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고소대는 전라좌수영 성체를 보완해 만든 대포 발사대, 포루이다. 예전에는 고소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비각만 남아있다. 고소대 (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 ) 수군대첩 비각 옆 타루비가 있다. 타루란 눈물을 흘린다는 뜻으로 1603년 이순신이 전사한지 6년 뒤 (선조 36) 에 이순신 휘하에 있던 좌수영의 군인들이 이순신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전라도 정읍 현감 이순신이 여기 여수에 있는 전라좌수영에 부임했다. 계급은 전라좌수사, 지금의 1함대 사령관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군정은 문.. 더보기 청와대 소정원 , 대통령 관저 소정원 청와대 소정원은 트럼프 전 대통령 부인 멜라니아 여사도 걸었던 길이 있고 사망이 뚫려있어 청와대 본관, 관저등, 모든 건물로 통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야생화로 가득하다. 청와대 구본관 터 고려때 부터 청와대 자리는 명당으로 불렀다. 1990년 청와대를 새로 만들 때 청와대 자리 길지를 알리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천하제일복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연릉오거라는 사람이 새긴 글로 중국 남송 시대 연릉 지역에 살았던 명필 오거의 글자를 집자해서 바위에 새긴 것으로 추정한다. 이 글씨를 새긴 시기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재건을 위해 원납전을 백성들에게 받아야 했는데 원성이 커지자 왕권강화, 민생 안정을 위해 천하제일 명당에 궁궐을 중건해야 한다는 명분이 필요해서 민심을 달래기 위한 흥선대원군의 상징 .. 더보기 Blue House 투어 : 청와대에 푸른 기와를 올린 이유 2022년 대중에게 전면 개방된 청와대 뒤로 높이 342m 의 북악산이 위치해 있다. 사람의 얼굴을 닮아 면악 또는 백악산이라고 불린다. 큰 바위 두개가 용의 눈으로 옛날부터 전해지기로 청와대, 경복궁 터가 북악산용의 기운에 딱 맞는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청와대에 푸른 기와를 올린 이유청와대 본관의 푸른 기와는 15만장을 얹은 것이다. 이 푸른 기와는 기와를 굽고 유약을 발라서 1000 도씨가 넘는 고온에서 다시 구워야 한다. 푸른 기와를 올린 이유는 130년전 전봉준의 동학농민 운동 실패 후 뿔뿔이 흩어진 동학군의 일부가 동학의 정신을 이어받은 새로운 민족 종교 보천교를 창설했다. 그러나 조선을 식민지화하던 조선총독부가 일본 종교 신도,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남겨놓고 이 민족 종교들을.. 더보기 완도 고금도 묘당도 속 충무사 이순신 유해가 잠들었던 곳.. 묘당도 전남 고금도에는 묘당도라고 불리는 작은 섬이 있다. 원래는 섬이였으나 간척사업으로 고금도와 하나가 되었다. 충무사 1597년 7월 명나라 원군, 해군이 도착한다. 진린이 이끄는 5천여 군사들이 고금도에 진을 쳤다. 이후 명나라 해군과 연합작전을 펼친다. 그 조명연합군 본부가 있던 곳에 충무사가 있다. 충무사가 있던 자리에 원래는 삼국지의 관우를 모시던 관왕묘가 있던 자리로 전쟁 후에 이자리에 비석을 세웠다. 이 관왕묘비를 세운 사람은 명나라 해군 사령관 진린이다. 월송대 이순신이 마지막 노량해전을 치른 후 전사하고 임진왜란도 끝이 난다. 이순신의 유해는 이곳 조명연합군 본부가 있는 고금도에 임시로 안장된다. 지금도 이순신의 초분지에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 그리고 그해 겨울 그의 고향이자 선영이 있.. 더보기 용산 미군 기지 투어 드래곤 힐 호텔 서울 시내 한복판에 미군 기지가 있었다. 용산 기지의 면적은 여의도의 절반 규모로 축구경기장 200개 크기의 기지였다. 그러나 지도에서 확인하면 용산 미군 기지는 표시 되지 않았다. 반환된 용산 기지가 개방되었다. 아래 하얀 건물은 미군이 이곳의 주인이 되기 전 일본군 초소였다. 현재 드레곤 힐 호텔 자리는 일본 조선군 사령관 관저가 있었던 자리에 호텔을 지은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일본군 초소와 돌기둥이 아직 남아있다. 용산기지 안에는 곳곳에 문인석과 동자상들이 남아있다. 이것은 무덤을 지키던 석상들인데 옛날에 조선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는 증거이다. 사우스포스트 용산 미군기지는 메인 포스트와 사우스포스트로 나뉜다. 사우스포스트 벙커 용산 군사시설 중 제일 상징적인 곳으로 일제 시대 일본.. 더보기 부산 제한유엔기념공원 : UN 공원 속 참전국 이야기 유엔기념공원 7월 27일은 UN군 참전의 날로 우리나라에서 지정되어 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어 유엔군의 희생과 봉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1950년 10월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자 그로 인해 UN군 사상자가 늘며 유해 안장할 곳이 필요했고 제한유엔기념공원은 1951년 1월 6.25 전쟁 전사자 매장을 위해 UN군 사령부가 조성한 곳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던 장병들의 유해를 모아 안장하기 시작했다. 세계 유일의 UN군 묘역으로 평화를 위해 생명을 바친 11개국 2327명 유엔군 장병들이 잠들어 있다. 휴전 후 1955년 대한민국 국회는 유엔군에 보답하기 위해 이곳 토지를 UN군에 영구 기증하기로 결정한다. UN 묘역이 부산에 조성된 이유는 부산국제영화를 하던.. 더보기 연천 경순왕릉 : 신라의 마지막 왕은 왜 이곳에 묻혔나? 10세기 후반 978년 신라 56대 임금이자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의 계속된 침공에 경순왕은 신라를 고려에 내어준다. 그리고 경순왕은 개경에서 눈을 감는다. 경순왕의 관은 조상들이 묻힌 경주로 향했다. 그러나 왕실은 왕의 무덤은 수도에서 백리밖에 두지 못한다는 원칙을 내세우며 운구를 멈추게 했다. 고려는 신라 유민들의 봉기를 우려했던 것이다. 결국 경순왕은 결국 고랑포 신라 국경을 눈 앞에서 두고 개경에서 80리 거리 북쪽 언덕에 묻히게 된다. 경주 밖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다. 야산에 버려졌던 경순왕릉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사라진다. 그러다 조선 영조때 1746년 경주 김씨 후손들에 의해 발견되지만 또 다시 잊혀진다. 그러곧 한참 뒤 1970년대 들어서야 총탄 가득한 경순왕.. 더보기 이전 1 2 3 4 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