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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

단테 신곡 줄거리 속 9개의 지옥은 무엇? [이전글] 단테 신곡 의미 단테 신곡 줄거리 단테가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는다. 숲에서 나타난 괴수 세마리를 보고 굉장히 놀란다. 여기서 세 마리 동물은 인간이 죄를 짓게 하는 3가지 악의 본성을 의미하는데 늑대는 탐욕, 사자는 교만, 표범은 정욕을 의미한다. 이때 베르길리우스(단테가 가장 존경하던 시인) 가 나타난다. 그와 함께 순례길을 떠나게 된다. 지옥문 앞 어두운 숲 지옥문 앞에 도착한다. 단테가 생각한 신곡 속 지옥은 춥고, 멈춰져 있고 어두운 곳으로 죽음의 희망조차 없는 곳으로 9옥까지 있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심각한 죄를 단계별로 묘사하고 있다. 로뎅의 보기 로뎅의 속 생각하는 사람 현대 조각의 아버지 거장 로댕이 자신의 인생을 다 바쳐서 만든 최고의 걸작이.. 더보기
로뎅의 < 지옥의 문 > 속 생각하는 사람 현대 조각의 아버지 거장 로댕이 자신의 인생을 다 바쳐서 만든 최고의 걸작이 바로 이다. 지옥의 문은 7M정도 되는 거대한 문으로 1880년 프랑스 정부가 실제로 장식미술관의 중앙문 정문으로 만들려고 제작을 의뢰했다. 로댕은 피렌체 산 조반니 세례당의 에 감명받아 지옥을 주제로 제작하게 되었다. 지옥의 문 중간에 프로젝트가 중단이 되었으나 로댕이 작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만들었으나 완성을 지키지 못한다. 1926년 로댕 사후 10주년에 로뎅의 작품을 모아서 지금의 청동 을 만들었다. 지옥의 문에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200여명의 인물이 조각되어 있다. 생각하는 사람 200여명의 인물은 독립상으로 만들어졌고 그 작품들 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이 문 바로 위에 이다. 로댕의 대표작으로 여기는 작품이 인데 지옥.. 더보기
일제강점기 속 최초 크리스마스 씰 (Christmas seal) -셔우드 홀 / 엘리자베스 키스 우리나라 최초 크리스마스 씰 우리나라의 최초의 크리마스 씰을 만든 사람은 셔우드 홀로 한국에서 의료봉사를 하던 로제타 홀의 아들이다. 셔우드 홀은 이모처럼 따르던 박에스터(한국 최초 여의사)마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자신도 부모님처럼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 셔우도 홀이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한 사람이다. 셔우드 홀은 의사가 되기 위해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1928년 황해도 해주에 돌아와 한국 최초 결핵 전문 요양 병원인 해주 구세요양원을 설립한다. 병원 운영을 위해 셔우드홀은 9개의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게 된다. 그 중에 1932년 첫 번째로 발행됐던 남대문 씰이었다. 그러나 처음 크리스마스 씰의 도안 이것이 아니였다. 이순신의 거북선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이순신 거북.. 더보기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유네스코 등재되다.( 크리스마스 휴전 역사)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탄생 배경 오스트리아의 신부였던 요세프 모어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알프스의 작은 성당에서 미사를 들이기 위해 작곡했다고 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과 독일군이 전장 한가운데 대치하던 상황이었다. 1914년 12월 24일은 전쟁 후 첫 크리스마스 이브였고 참호 밖으로 울려 퍼진 익숙한 선율, 독일군 진영에서 시작된 캐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에 반대편 영국군 진영에서 백파이프 연주로 화답을 했고 두 진영들은 서서히 경계를 풀고 노래가 끝나자 영구군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영화는 실화를 토대로 만든 영화이다. 1914년 크리스마스 아침에 독일군들은 펫말을 들고 나와 우리는 당신을 쏘지 않겠다고 했고 영국군도 크리스마스만큼은 전쟁하지 말자고 평화협정.. 더보기
메디치 가문 피렌체 두오모 성당을 !? 그리고 몰락까지 (이전내용) 로렌초 데 메디치 가문이 후원한 예술가 과학자 누구? 70-3 메디치 가문이 있던 시기에 교회의 가장 큰 죄목은 탐욕이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모으는 일, 요구하는 일은 죄악으로 치부했었다. 이에 은행업자, 이자 대부업자들에게 구원을 얻는 방법으로 교회에 기부하라고 했고 메디치 가문도 자신이 지은 죄를 씻고 구원을 얻기 위해 큰 결정을 한다. 두오모 성당 돔 후원 바로 피렌체의 상징이자 랜드마크가 된 두오모 성당에 기부하는 것이었다. 당시 지붕이 없었던 두오모 성당의 지붕을 만드는데 엄청난 후원을 했다. 돔의 지름은 약 45m로 무게 약 2.5 톤을 견뎌내야하는 기술의 부재로 미완으로 남아있던 성당이었다. 그러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돔을 만드는 방법을 생각했고 돔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수.. 더보기
로렌초 데 메디치 가문이 후원한 예술가 과학자 누구? 70-3 로렌초 데 메디치 등장 로렌초 데 메디치 (1449-1492) 는 코시모의 손자로 피렌체의 황금시대를 이끈 인물이다. 가문의 위세가 최정점에 올라온 시기 로렌초 데 메디치의 등장으로 현재까지 기억하는 가문으로 성장한다. 할아버지 코시모가 사망하고 병악했던 아버지 피에로마져 사망한후 1469년 겨울, 20살의 나이로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 된 로렌초이다. 사실 로렌초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인물이다. 로렌초는 학문 노래 무술 등 다재다능한 인물이었고 그 중에 가장 뛰어났던 것은 언변이었다. 또한 메디치가 지금껏 명성을 이어올수 있었던 이유는 엄청난 돈을 문화 예술에 투자해서 르네상스 발전에 크게 일조했기 때문이다. 예술에 투자 우피치 미술관 소장품은 메디치 가문에서 미술가에게 의뢰하거.. 더보기
크리스마스 캐럴 작품 속 찰스 디킨스의 메세지는? 크리스마스 캐럴은 영국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소설로 그의 대표작으로는 크리스마스 캐럴 위대한 유산 올리버 트위스트 등이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스크루지이다. 줄거리 굉장한 구두쇠인 스크루지 영감이 크리스마스 이브날 꿈을 꿨다. 꿈에서 세 유령은 스크루지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보고 난 스크루지가 악몽에서 깨어나 개과천선하는 내용이다. 과거 유령 스크루지를 찾아온 과거의 유령을 통해 가난에 고통받던 젊은 날의 스크루지를 만나게 된다. 과거의 유령이 보여준 장면은 사랑하는 연인이 떠나고 돈벌이에 집착하는 스크루지 모습이다. 그때부터 피도 눈물도 없는 스크루지의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 현재 유령 현재의 유령이 보여준 장면은 가난하지만 화목한 가.. 더보기
여진족 변발 / 치파오 유래 (청나라 문화 이야기) 역사저널 395회 중국하면 떠오르는 많은 부분이 대부분 청나라 문화이다. 여진족 발해의 말갈족이 망하고 거란에 점령된 후 여진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이 여진족이 금나라를 거쳐 후금- 청- 만주족으로 불리게 된다. 변발 기능 만주족(여진족) 은 전쟁이 많았다. 갑옷, 투구 등을 자주 착용했기 때문에 머리 앞부분을 밀고 뒷부분만 남긴 것이다. 그러나 다 밀지 않고 뒤를 남긴 이유는 만주족은 머리카락에 사후 영혼이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쟁에서 전사한 시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설1 : 전투시 머리에 투구를 쓰면 땀으로 발생하는 위생문제 해결을 위해 설2: 말을 타고 달릴 때 시야확보를 위해서 변발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통치장치이기도 했다. 변발을 하지 않을 경우 사형에 처했는.. 더보기
양귀비 이야기 벌거벗은 세계사 83회 중국 역사상 최고의 미녀로 뽑히는 양귀비는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갖추고 있고 중국 4대 미녀 중 한명으로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미모를 가진 미녀가 양귀비이다. 양귀비가 유명해진 이유는 중국 역사상 최고 미인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사랑 이야기가 금기를 깬 막장 스토리도 하기 때문이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막장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권력자의 아내로 사치와 향락을 일삼은 양귀비다. 양귀비 이야기는 10c~11C 편찬된 중국 당나라 왕조의 정사 구당서와 신당서를 바탕으로 한 얘기이다. 중국의 200 년의 역사를 알려면 상하이를 가야 하고 3000년 역사를 이해하려면 시안을 가야한다. 그러나 중화 문명 5000년의 역사는 뤄양을 가봐야 한다는 말이있다. 뤄양은 중국 왕조.. 더보기
안록산의 난 -> 양귀비의 죽음 -> 당 나라 멸망 과정 안록산은 누구? 당 제국의 몰락을 이끈 양귀비와 그의 일가 사치뿐 아니라 양귀비와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안록산이 있었다. 안록산은 체격과 덩치가 매우 크고 이란과 돌궐계 이민족 출신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붉은 머리와 파란 눈의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당시 당 제국은 외국과의 교역도 활발하고 개방적인 제국이라 외국인도 출세가 가능했던 시기였다.   이민족 출신 안록산도 출세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지방의 군사를 통솔하는 절도사 직책을 맡게 된다. 당시 현종 때 당 제국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절도사의 권한이 매우 높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방의 군사권 뿐만아니라 행정, 재정권까지 장악하며 점점 황실에서 통제하기 어려워지는 권력자가 되었다.  742년 경에는 안록산은 평로 절도사, 범양 절도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