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대, 보, 진
돈대는 땅을 평평하게 쌓아서 성을 쌓아 만든 일종의 소대 규모의 인력이 배치되는 초소와 비슷한 곳이다. 보는 중대규모, 군사 주둔지, 진은 대대 규모 군사 주둔지이다. 그래서 하나의 보 안에도 여러 개의 돈대가 있을 수 있다. 강화도에는 5진 7보 53돈대가 설치되어 있다.
강화도는 서울의 한강이 서해로 나오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모든 세금, 공납의 배들이 한강보다 폭이 좁은 강화해협을 통해서 들어왔고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좁은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방어기지를 설치했다. 강화도로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한 김포 문수산성, 강화도쪽 초지진이 가장 중요한 곳이다.
초지진
강화도 초지진은 사적 제225호로 강화를 지키던 1차 방어기지였다. 현재는 돈대만 남아있다.
광성보
두번째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는 광성보이다. 광성보는 사적 227호로 손돌목 근처 방어시설이자 신미양요의 격전지였다. 광성보에 가면 초지진까지 모두 보인다. 빠른 유속이 적의 진격을 늦출수 있어 적에게 포를 쏘기 용이한 지형이다.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금압령으로 일어난 병인양요때만 해도 프랑스군도 처음에는 물길을 파악하는데만 그쳤다.
이후에 1866년 7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신미양요가 일어나게 되고 미국은 강화도 초지진 공격을 시작으로 광성보 쪽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미국은 광성보를 해상과 육지로 들어와 함대의 포격과 함께 육지전을 병행한다. 이때 광성보를 지키던 수비군이 전멸한다.
미국은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1860년대에 무기가 엄청 발전했고 조선은 당시 불을 붙이고 쏘는 화승총으로 1분에 1발을 발사할수 있는 낙후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조선의 포는 터지지 않고 배에 구멍만 낼수 있을 정도였다. 조선수군은 무명을 입고 있었는데 당시는 여름이었고 더위에도 총탄을 방어한다는 목적으로 솜옷을 9겹이상 껴입고 싸웠고 이것은 도리어 몸에 불이 쉽게 붙게하여 더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조선군의 사상다는 250명에 달했고 당시 미군의 피해는 단지 사망자 3명, 부상자 10여명이었다.
이렇게 열세한 병력에도 끝까지 저항하며 싸웠던 조선군에 대한 기록이 미군측 기록에도 남아 있다. 당시 신미양요의 지휘관으로 왔던 로저스 제독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미스터 션사인 속 신미양요 조선군 묘사
*미스터 션사인 촬영지 강화도 광성보 (어재연 장군과 신미양요 이야기)
광성보에는 광성보 전투 전사자 중 신원을 알수 없던 51명을 기리는 묘를 마련해 놓았다.
어재연 장군 수자기
당시 어재연 장군이 지키고 있었고 조선은 어재연 장군을 포함 대부분의 군사가 사망했다. 이때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총지휘관의 본영에 꽂던 깃발)도 빼앗긴다. 이 수자기는 미군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던 것을 돌려받지 못하고 2007년부터 장기 대여의 형태로 국내에 보관 중이다. 강화역사박물관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강화전쟁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미국은 1854년 군함을 통한 위협으로 일본을 개항시킨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조선은 일본보다 못한 나라라고 생각해 쉽게 개항이 되리라 생각했으나 예측 못한 조선의 강한 저항에 미군은 물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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