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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연개소문과 연남생 고구려 멸망시키다. 21회

7세기 요동을 차지한 나라는 고구려로 당 태종은 유언으로 요동에 가는 것을 금지했다. 그것은 자신이 추진하던 고구려 정벌을 멈추라는 유언이었다.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에서 실패했고 그때 장수가 바로 연개소문이다.

 

중국 시안의 당 태종 무덤
중국 시안의 당 태종 무덤



연개소문은 누구? 

연개소문은 고구려 최고 관리 대대로(고구려 국정을 관리하는 최고 관등) , 막리지(국사를 총괄한 관직) 를 역임했던 집안으로 고구려 최고 가문의 촉망받는 후계자였다. 당시 가문은 아버지의 관직을 아들이 이어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고구려의 다른 귀족들은 연개소문의 세습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연개소문의 성격이 포악하다는 이유였으나 사실 연개소문의 집안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삼국사기에 나온 연개소문의 성격
삼국사기에 나온 연개소문의 성격


연개소문 쿠데타 

그래서 연개소문은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그들에게 사과를 한후 관직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642년 10월 연개소문을 포함 고구려의 주요 대신 및 수많은 이가 참석한 열병식에 연개소문의 부하들은 칼을 들고 연회장에 뛰어들었고 이날 대신급들 100여명이 희생되었다. 원로급 대신들이 모두 희생된 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고구려의 왕 영류왕이 있는 궁궐로 가서 왕을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고 영류왕의 조카 허수아비왕 보장왕을 세웠다. 견제 세력을 없애고 고구려의 1인자로 우뚝 선 연개소문이다. 

당시 고구려를 위협하던 중국의 당나라 이전에  612년 중국 수나라는 11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고 고구려 을지문던 장군이 살수에서 30만대군을 격퇴한 전투에서 격퇴한 후  618년 수나라에서 당나라로 교체되었고 고구려 위에는 당나라 아래는 수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있엇다. 

 

당나라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고구려
당나라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고구려

 

이때 연개소문을 찾아온 신라의 실권자 김춘추가 찾아와 동맹을 원했고 연개소문은 이때 신라의 죽령을 요구했다.  죽령은 한강 상류의 금싸라기 땅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를 김춘추가 거절하자 김춘추를 가둬버린다.  이는 신라가 다시는 고구려와 외교를 하지 못하도록한 연개소문의 외교 실패에 가까운 정책이었다. 이후 김춘추는 간신히 탈출해 신라로 돌아갔고 이것이 훗날 고구려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죽령 위치
죽령 위치



1차 여당전쟁 
당시 당 태종은 중국을 중심으로 영토를 확장 중이었고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한 명분으로 연개소문의 쿠테타를 문제 삼았던 것이다. 645년 4월 20만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쳐들어온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의 요동성이 함락되었다. 

안시성 전투 
그리고 645년 6월 20일 당 태종은 안시성에 도착한다.  당나라 군대에 맞서 고구려는 안시성을 지켜낸다. 안시성은 험준한 산능성을 이용해 축조되어서 공격이 쉽지 않았고 안시성의 성벽은 흙과 돌을 이용해 만들어서 더욱 견고했다.  

당나라군의 일반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자 토산을 쌓은 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60일 넘게 쌓은 토산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고구려군은 이 토산을 점령한다. 결국 645년 9월 18일 퇴각 명령이 내려지고 쫒기듯 당나라로 돌아갔다. 

 

연개소문의 권력

이는 쿠테타 이후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한 연개소문은 권력이 더욱 견교해진다.  당시 연개소문은 대대로 최고관직에 있었으나 임기가 3년이었고 더 큰 권력을 갖기 위해 새로운 관직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바로 태대대로였다. 태대대로는 무기한 종신직이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기 못하고 집안식구에게 권력을 나눠주기 시작한다. 

연개소문에게 3 아들이 있었고 이들에게 권력을 나눠주었다. 그중에 큰 아들 연남생에게 18살 어릴때 부터 중리대형(고구려의 벼슬로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급 지위)의 막강한 권력을 주었고 23살이 된 연남생은 최고 귀족회의까지 참여하게 된다. 

 

연개소문의 세 아들
연개소문의 세 아들



나당연합 
648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치기 위해 신라의 김춘추와 연합하게 된다.  그런데 649년 나당연합을 맺었던 당태종이 갑작스럽게 죽게되었고 이때 당 태종은 유언을 남긴다. 결국 당태종의 죽음으로 나당연합의 전쟁준비는 멈추게 되고 20여년의 시간이 흐른다. 그 동안 연개소문 가문이 고구려를 차지하게 되고 이때 백제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백제는 나당연합의 공격으로 멸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당 고종과 무열왕 김춘추가 연합했던 것이다. 


2차 여당전쟁 

연남생의 압록강 전투 대패 

661년 당 고종은 20여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2차 고구려를 침공한다. 당나라는 바다를 건너 평양성을 공격, 압록강을 건너 육로로 쳐들어 오고 있었다. 그리고 3만의 군대로 첫 번째 아들 연남생에게 방어하도록 했으나 압록강 전투에서 3만의 군사는 전멸하게 된다. 연남생은 전투를 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양성을 지켜낸 연개소문
게다가 평양성 앞에는 바다를 건너온 당나라 군대가 오고 있었다. 661년 8월 당나라군대는 연개소문이 있는 평양성을 무서운 기세로 공격했고 전쟁은 장기전으로 흘러 662년 음력 1월 날이 풀리자 연개소문은 당나라군을 향해 총공격을 시작한다. 당나라의 장수와 그의 아들 13명까지 죽인 연개소문의 활약으로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 승리로 끝이 난다. 


 


1차, 2차 여당전쟁 모두 당나라는 패배를 하게 된다.  무력으로는 고구려를 이길수 없다고 생각했던 당나라는 태도를 바꿔 당나라 최대 종교 행사인 태산봉선에 고구려를 초대하기까지 했다.  이곳에 고구려까지 초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당과 고구려 사이에 평화가 찾아온다.  

 

연개소문 죽음 그리고 형제의 난

그런데 이때 연개소문이 죽게된다.그리고 세 아들에게 형제끼리 싸우지 말하고 유언을 남긴다. 그리고 연남생이 연개소문의 권력을 이어받게 되지만 결국 형제들 간의 권력 다툼이 벌어지게 된다. 

사실 이들은 사이가 좋았으나 주변에서 서로를 이간질시켜 서로를 의심하게 된 것이다. 이때 연남생이 자리를 비운 사이 동생들을 죽일 것이라는 이간질에 연남생에게 군사를 보내 피습하게 되고 연남생은 평양성에서 국내성으로 피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관직까지 내놓게 된다. 


 


 

연남생의 배신

 

그리고 당나라는 다시 한번 고구려를 쳐들어온다. 그리고 연개소문이 지키던 평양성이 함락당한다. 그것은 바로 연남생이 고구려를 배신하고 당나라를 도운 것이다. 연남생은 동생들의 배신에 복수를 다짐하며 당나라를 도왔던 것이다. 당나라군의 길잡이가 되어 당나라를 안내했다. 

 

고구려 멸망. 
그리고 한달 넘게 평양성을 포위한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마침내 668년 9월 고구려는 항복을 선언한다. 700년간 이어온 고구려는 연남생의 배신으로 멸망했다. 연남생은 고구려를 배신한 대가로 당나라 상류층으로 죽을때까지 풍족하게 살았다. 지금도 연남생과 그 후손들의 무덤은 중국땅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