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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1597년 난중일기 : 통절한 심정이 담긴 이순신의 기록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은 의금부로 압송된다. 당시 조선수군총사령관 이순신이 압송되는 모습을 보며 백성들은 통곡을 했다.  이순신은 왜 의금부로 압송이 되었을까? 

1592년 4월 13일 부산앞바다에 기습적으로 처들어온 일본군에 의해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불과 20일 만에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온 나라가 일본군에게 짓밟혔다. 그러나 조선의 바다는 달랐다. 해상에서는 이순신의 일방적인 승리로 일본 수군의 길목을 막고있었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수세에 몰렸던 조선이 한숨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해로 일본의 정예부대를 급하게 파견하게 된다. 

 



1592년 7월 8일 한산대첩 

한반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벌인 전투인데 한산대첩 하루 전날 견내량이라는 곳에 외군의 배가 모여들었다. 이곳은 협소하고 암초가 많아 배끼리 충돌 위험이 있는 곳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싸우기가 부담스러워 미끼조를 견내량에 투입해서 한산도 앞바다 넓은 곳으로 끌어낸 후 전투를 벌였다.  이때 학이 날개를 펼친 모습의 학익진 전법으로 일본 수군 59척이 격침되었고 3일일만에 100여척을 침몰시간 역사상 유례없는 일을 거둔다.

 

견내량 위치
견내량 위치



한산대첩은 세계 해전에서도 보기 드문 포위 섬멸전을 펼친 한산대첩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 금지령을 내렸다.  그리고 한산대첩이후 왜군들에게 이순신의 존재는 거대한 두려움으로 각인되었다.  한산대첩 등 수많은 전공의 이순신은 승진하게 된다. 

그래서 전라, 경상, 충청도를 통제하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다. 조선의 수군 총 사령관이 된 것이다. 임진왜란의 승기를 잡은 조선은 1년 만에 한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삼도수군 통제사 이순신
삼도수군 통제사 이순신

 

1597년 4월 1일 이순신 백의종군

해전 금지령으로 일본과의 휴전이 길러지던 어느날. 일본 장수가 흘린 일본의 가토 장군이 수군을 이끌고 출정할 것이라는 정보였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바로 출정명령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신중해야 했다. 적이 흘린 정보를 모두 믿을수 없었고 고민끝에 출정을 마음먹었으나 선조는 이순신의 망설임에 분노하여 그를 압송한다. 이렇게 죄인이 되어 끌려갔던 이순신은 28일 만에 풀려나지만 몸과 마음이 이미 상처받고 괴로웠을 1597년이었다. 

그리고 1597년의 첫 일기는 이순신이 감옥에서 풀려난 4월 1일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순신은 죄가 사면된 것이 아니라 보류된 것으로 백의 종군하게 된다.

 

1597년 4월 1일 난중일기
1597년 4월 1일 난중일기



흰옷을 입고 군사를 따라간다.는 뜻으로 다른 장군을 보좌하거나 공을 세워 만회하도록 한 처벌이었다.  결국 삼도수군 통제사에서 보직해임된 이순신이었다. 백의종군으로  당시 조선군 총사령관 권율의 진영이 있는 합천 초계로 향했다.  권율 밑에서 작전권, 지휘권 없이 일을 해야했다.      

 

 

1597년 4월 11일 죽음을 생각했던 이순신

이때쯤 초계로 향하던 길에 어머님의 부고를 듣게 된다.  이순신을 만나러 오는 길에 돌아가신 것이다. 이순신의 두 형은 일찍 죽고 아버지마저 일찍 돌아가셨기때문에 이순신이 유일하게 기댈 곳이자 평생의 자랑이었던 아들이었다. 난중일기의 첫 기록이 어머니에 대한 기록이 있을 만큼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이순신이었다. 그러나 죄인 이순신에게는 장례식에 갈수 없었다. 이때 이순신은 자신의 죽음까지 생각했다.

 

1597년 4월 11일 난중일기
1597년 4월 11일 난중일기

 

칠천량 해전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몸담았던 수군이 궤멸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60여척의 수군 파옥선은 물론이고 수군들을 모두 잃게 된것이다. 칠천량 해전의 페배로 조선의 바닷길이 일본수군에게 넘어간다. 일본군은 한성으로 진군했다. 

 

이순신의 복직
이에 선조는 이순신을 복직시켰다. 그러나 이미 대패하고 남은 군사는 군관 9명과 병사 6명이 전부였다. 병력은 물론 배 한척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이순신은 수군을 모으는 일부터 시작하고 12척의 배가 남아있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때 선조는 이순신에게 육군에 편입할 것을 명령하지만 이순신은 자신에게 12척의 배가 남아 있다고 말한다.

 

선조임금이 이순신 복직시키며 보낸 편지



그리고 벽파진에 꾸려졌던 수군을 해남의 울돌목으로 옮긴다. 울돌목이란 울며 돌아가는 길목이란 뜻으로 이것을 한자로 바꾼 명칭이 명량이다.   

 

울며 돌아가는 길목: 올돌목을 한자로 명량이라고 한다.

 


이순신이 명량을 선택한 이유
명량은 바다에서 온 물살이 좁은 지역을 오면서 거세지는 지형적 특성이 있는 지역이었다. 게다가 암초에 부딪친 물살이 회오리까지 치는 곳이었다.  수적으로 불리하니 적선을 차례차례 격퇴하려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군사들을모아 놓고 말한다.

 

울돌목 위치
울돌목 위치
울돌목 모습
울돌목 모습
필사즉생, 필생즉사
필사즉생, 필생즉사

 

1597년 9월 17일 명량해전
1597년 9월 17일 마침내 대규모의 적선이 명량해협으로 몰려오게 되고 133척의 적선와 13척의 싸움이었다. 선두로 이순신의 배가 치고 나갔는데 12척의 배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를 맞은이 겨우 2개월 밖에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기세에서 밀린 조선수군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홀로 싸우기 시작한다. 그렇게 1시간 가량을 적선과 싸웠다. 그리고 조금씩 조선수군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오후 1시가 되자 전투의 흐름이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물살의 방향이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명량해협의 물살은 하루에 4번 흐름이 바뀌는데 물살이 너무 세서 거스르는것은 쉽지 않았고 일본 함대가 역류를 타고 일본수군은 조선의 판옥선에 접근할수 없었다. 이 반격의 기회를 살려 조선수군은 공격을 했고 이순신은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명량해전이다. 

10배이상의 전력차이를 극복하고 전쟁에서 이긴 전쟁은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명량해전을 마치고 1달 뒤 이순신은 아산 본가에 있던 셋째 아들이 사망했다는 편지를 받게 된다.  셋째 아들은 명량해전에서 진 분풀이를 하기 위해 이순신의 가족이 있는 아산을 일본군이 습격한 것이다. 

 

 

1597년 10월 14일 아들의 죽음 

이 감당하기 힘든 일을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남겼다. 어머니를 잃고 아들까지도 잃은 이순신의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전쟁중이였기 에 죽은 아들의 시신을 보러 갈수도 없었다. 

 

1597년 10월 14일 난중일기



명량해전 이후 보화도에 임시수군 사령부를 세우고 조선수군의 재건을 위해 여러가지 일을 시작한다.  1597년 10월 말부터 약 4개월간 수군 재건 사업에 돌입한다.  이때 함선 40여 척과 병력 2000여 명 이상을 확보할수 있었다.     


1597년의 난중일기는 통절한 심정이 담긴 이순신의 기록이다.  이순신이 가장 빛나는 전승을 거둔 1597년 이순신은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슬픔과 고뇌를 겪고 있었다. 



 

난중일기 내용, 의의 : 정유일기 속 명량대첩 기록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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