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6년 조선의 19대 왕 숙종은 장희빈에게 빠져 국정을 소홀이하고 있다는 상소에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숙종과 장희빈의 문제가 국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장희빈은 누구?
<단암만록>을 통해 알려진 장희빈의 실제이름은 장옥정이다. 희빈은 빈=은 서열1위의 후궁이라는 뜻이다. 많은 드라마에 등장하면서 장희빈이라는 이름이 친숙해진 것이다. .
장희빈은 역관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당시 역관의 신분은 중인으로 재력있는 중인의 신분으로 잘살고 있었으나 아버지가 갑자기 죽고 어머니가 장희빈을 궁녀로 들여보냈다. 그래서 장희빈은 궁녀의 생활을 시작했다. 장희빈은 실록에 궁궐 여인의 미모가 언급된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그리고 숙종은 인경왕후 (첫번째 아내)가 전염병으로 죽고 힘든 날을 보내고 있던 시기로 이때 장희빈을 만났다. 당시 숙종은 20세, 장희빈은 22세였다. 숙종의 사랑을 받은 장희빈은 일반 궁녀에서 승은 궁녀가 된다. 승은 궁녀들은 왕의 아이를 가져 신분상승을 꿈꿨다.
그러던 어느날 장희빈을 쫓아내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명령을 내린 사람은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였다. 명성왕후는 장희빈이 간사하고 악독해서 분란을 일으킨다고 생각했고 당시 조선시대 당파는 서인과 남인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당시 명성왕후는 서인세력이었다. 명성왕후와 달리 남인 세력에 있던 장희빈은 정치적인 이유로 쫓겨났던 것이다.
화려한 중앙의 빨간색 가마에는 15세의 인현왕후가 타고 있었다. 인현왕후는 서인세력으로 판서등을 역임한 서인 실세 격 인물 민유중의 딸이었다. 그로부터 숙종과 인현왕후가 결혼한 어느 날 궁궐에 장희빈이 다시 궁궐로 들어오게 된다.
장희빈 궁궐에 재입성
장희빈을 다시 부른 이는 바로 인현왕후였다. 숙종이 쫓겨난 장희빈을 그리워한다는 이유로 장희빈을 다시 부른 것이었다. 그리고 숙종은 서서히 중궁전에 발길을 끊어버린다. 인현왕후를 멀리하고 장희빈만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숙종은 장희빈에게 별당을 지어주었다. 이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경제적인 부담이 상당했음에도 별당을 후궁에게 지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장희빈을 멀리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인현왕후의 부름에 오지 않았던 장희빈을 회초리를 들어 벌했다. 당시 장희빈은 숙종의 사랑을 믿고 안하무인했던 것이다. 이때 숙종은 장희빈을 숙원으로 책봉하고 노비 100명을 내린다. 그리고 종4품 숙원에서 종 2품 숙의, 정2풍 소의로 계속 품계가 올라갔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장희빈에게 인현왕후를 넘어설 기회가 찾아온다. 숙종의 아이를 임신한 것이다. 그리고 장희빈은 아들을 낳게 되고 숙종 즉위 15년 만에 첫 아들을 얻게 된 것이다.. 숙종에게 아들을 안겨준 장희빈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게 된다.
이때 장희빈의 산후조리를 위해 옥교를 타고 궁궐에 들어온 장희빈의 어머니에게 크게 분노한 신하들이 가마를 불태웠던 것이다. 당시 옥교는 사대부집 부녀자들도 함부로 탈수 없던 것이었다. 장희빈 집안은 중인으로 일부 양반만타는 옥교를 타고 왔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숙종은 이 일에 관계된 두 명을 잡아 엄벌에 쳐했고 이들은 죽음에 이르렀다. 이제 더이상 궁궐에서 장희빈을 막을 자는 없었다.
장옥정 희빈되다.
1689년 1월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겠다고 했던 것이다. 100일도 안된 아이를 원자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인현왕후 나이가 아직 어렸는데도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삼겠다고 하고 바로 원자로 삼았다. 그리고 장희빈을 정 1품 빈으로 임명했고 이때부터 장옥정은 장희빈은 되는 순간이었다. 궁녀출신이 중전이 되기는 불가능했으나 장희빈은 그것을 꿈꾸게 된다.
기사환국
그리고 보름 후 숙종이 원자를 정한 것은 성급하다는 상소를 송시열이 올렸던 것이다. 조선후기 정치계의 거목으로 실록이 3000여권이나 되었고 서인의 영수(우두머리)였다. 그래서 관직에 물러났던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문외출송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송시열의 관직을 모두 빼앗고 한양밖으로 추방하라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숙종은 송시열의 파직을 시작으로 서인 세력을 물갈이 하기 시작했고 그 자리에 남인을 채워넣었다. 이것을 기사년에 일어난 환국이라고 해서 기사환국이다. 이렇게 장희빈은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다.
인현왕후 폐위되다.
그리고 숙종은 인현왕후를 쫓아내겠다고 3년전 장희빈이 아들을 못낳을 것이라는 인현왕후의 꿈 이야기를 꼬투리잡아 이를 투기했다고 인현왕후를 폐비시켜버린다. 그렇게 1689년 5월 2일 인현왕후는 8년만에 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4일 뒤 장희빈은 중전이 되었다. 이것은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중전이 된 장희빈의 행복이 계속 될 것 같았으나 숙종의 발길이 점점 뜸해지기 시작했고 숙종은 인현왕후를 모셨던 젊은 궁녀에게 빠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숙종이 총애하던 후궁이 임신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희빈은 후궁을 불러 회초리를 때리고 항아리를 거꾸로 들어 후궁을 가줬는데 이를 숙종이 알게되면서 분노했다. 그리고 이 후궁을 결국 아들을 낳고 그녀가 바로 숙빈 최씨로 21대 영조의 어머니가 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조선 조정은 다시한번 환국이 일어난다. 서인과 남인이 역모를 꾸민다고 서로를 고발했는데 숙종은 이전과 달리 서인의 편을 들어 남인 세력을 제거했던 것이다. 당시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의 부정부패 사건이 일어났고 무능력한 남인들에 대한 실망 끝에 이것이 환국의 원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 폐비되었던 인현왕후가 다시 궁으로 들이겠다는 것이었다. 인현왕후는 그렇게 5년만에 궁으로 복귀하면서 장희빈은 다시 희빈 후궁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장희빈의 처소에서 악에 바친 장희빈의 고함이 끊이지 않았다.
장희빈 사약받다.
인현왕후는 복위 7년만에 후사도 없이 3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인현왕후의 죽음이후 1달 후 숙빈 최씨는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숙종에게 밀고한다. 화가 난 저주사건에 관련된 인물을 모두 잡아들이고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린다.
이렇게 결국 43세의 나이로 장희빈은 숨을 거둔다. 숙종은 장희빈이 죽기 직전 "빈어가 후비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후궁이 다시는 왕비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하는 것을 법으로 만든 것이다.
더이상 후궁은 중전이 될수 없다.
숙종 사후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어머니인 장희빈을 다시 중전으로 복위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하게 되고 경종은 재위 4년 만에 사망한다. 그리고 장희빈과 대립했던 숙종 최씨의 아들 영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장희빈은 다시는 복위할수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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