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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우씨 왕후 이야기 : 언제까지 권력을 잡았을까?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인..

드라마 우씨 왕후는 고구려 제 9대 왕 고국천왕과 고구려 10대 왕 산상왕은 형제관계로 두 형제모두 우씨왕후를 아내로 두었다. 우씨왕후는 형제와 결혼을 해서 두 번이나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우씨왕후 시대적 배경

고구려 초기 비류나부, 연나부, 계루부, 환나부, 관나부 5부족으로 이루어진 5부족 연맹체제였다. 5부의 장(대가, 소가) 들이 모여 고구려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제가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고 고구려 초기 5개 부족을 다스리는 군장의 힘은 왕에 맞먹을 만한 힘이었다. 5개의 부족 국가중 압록강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한 계루부는 강력한 군사력과 높은 문화수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5개 부족 연맹의 우두머리 격이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 또한 계루부 출신이다. 주몽 이후로도 고구려 왕 대부분은 계루부 출신이었다. 

 


우씨는 어떻게 왕후가 되었나? 

우씨 왕후 아버지 우소의 출신은 연나부 소속이었는데 고구려 개국공신 부족은 계루부를 도와 비류나부였고 이 세력이 주로 왕비를 배출했다. 그러나 7대왕 차대왕때 심한 폭정으로 연나부 출신의 명림답부가 왕을 죽이고 고국천왕의 아버지 8대 신대왕을 옹립하게 된다. 그래서 신대왕은 자신을 도와준 연나부 출신의 여인을 자신의 며느리로 삼아 우씨 왕후가 고국천왕과 결혼하게 된 것이다. 우씨왕후는 신대왕 즉위를 도운 아버지의 공으로 고국천왕의 왕후가 될수 있었던 것이다. 

 

 

우씨 왕후 성격

우씨 왕후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게 남아있지 않는다. 훗날의 역사적 기록으로 추측해보면 어린시절부터 당차고 적극적인 여인으로 추측된다.

 

 

우씨가 왕후로 책봉된 4년 후 184년 중국 후한의 요동 태수가 침공을 했고 고국천왕이 직접출정을 한다. 이때 연나부의 도움으로 후한 요동 태수와의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후 고구려에서 우씨왕후와 연나부의 입지는 더욱 강력해져갔다. 이후 6년의 세월이 흘러 190년 우씨 왕후의 친척이자 연나부 출신의 귀족이었던 어비류, 좌가려가 권력을 남용하며 백성을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에 고국천왕은 이들을 제거하려했다. 이에 이들은 반란을 도모했고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고국천왕은 직접 출정해 이들을 진압한다. 친척들의 반란 이후 우씨왕후는 어떠한 처벌도 없었다. 

 

을파소 등용 

고국천왕은 점점 세력이 커지는 연나부를 견제하기 위해 왕후의 친척과 무관하고 귀족 세력과도 무관한  농부출신의 을파소를 고구려 재상으로 임명했다. 계속되는 귀족들의 횡포에 자영농 계층이 몰락하고 귀족의 노비가 되는 상황이었다.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백성들의 신임을 얻기 위한 정책이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명재상으로 나중에 고구려의 최고 국상까지 올라가는 인물이다.

 

194년 고국천왕은 을파소와 함께 진대법을 완성한다. 진대법은 흉년이나 곡식이 부족한 봄에 양곡을 대여해주고 수확기에 갚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우리나라의 첫 번째 구율제도이다.

 

고국천왕 사망한 날 

그러나 197년 5월 고국천왕이 갑자기 사망한다. 고국천왕의 사망소식은 아직 모두에게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고 남편이 죽은 그날 밤 우씨 왕후는 고국천왕의 동생 발기를 집을 찾아간다.  당시 고국천왕에게는 3명의 동생들이 있었다. 고국천왕와 우씨왕후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첫번째 동생 발기에게 왕의 죽음을 숨김채 선왕이 죽으면 왕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했으나 발기는 자신은 이미 그런 순서에 있다고 생각해 우씨왕후를 내친다. 

 

 

우씨왕후는 지체없이 둘째 동생에게로 찾아갔다. 

 

형사취수혼이란? 

형사취수혼은 형이 죽은 뒤 동생이 형을 대신해 형수와 부부 생활을 계속하는 북방 민족의 혼인 풍습으로 고구려를 비롯한 북방민족은 많은 전쟁에서 형이 먼저 싸우다 죽게 되면 형의 자식과 부인을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들을 방치하면 결국 종족, 부족의 세력 약화로 이어지기 때문에 동생이 결혼이라는 방식으로 부족의 세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또한 형수가 다른 부족사람에게 결혼하면 재산을 가져가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유로도 형사취수혼을 했다. 

 

고국천왕은 179~197 년 재위, 중국 후한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한 왕이다.

 

 

우씨왕후가 선택한 사람은? 

우씨 왕후는 이런 형사취수혼을 이용하려했던 것이다. 시동생과의 취수혼을 통해 왕후 자리를 지키려했던 것이다. 둘째 동생 연우는 반갑게 우씨왕후를 맞이했고 아랫사람이 하는 직접 고기를 썰어 우씨왕후에게 대접했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일로 손가락을 다치니 왕후가 치마끈을 풀어 다친 손가락을 싸매주었다.  -삼국사기 중-  이것은 남녀간의 은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왕자 연우는 우씨왕후와 함께 궁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연우를 왕의 임종 현장에서 왕의 유언을 직접듣게하는 고명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합법적으로 왕에 오르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셋째왕 연우는 우씨왕후의 도움으로 고구려 제 10대왕 산상왕이 된다. 

 

 

 

발기의 반란

그러나 둘째 왕자 발기는 군대를 끌고 와 왕궁을 포위하고 연우를 가족들을 목베어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그러나 궁안에 발기를 지지하는 세력은 없었다. 고구려는 이런 난폭한 성격은 왕이 될 사람이 못된다고 생각해 경계를 하는 일이 많았고 이후 기록에 연우의 가족데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봐서 발기가 연우의 가족을 죽인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이후 3일 후 지지세력이 없던 발기는 한나라 요동 태수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군사를 빌려주면 자신의 모국 고구려를 평정한 후 후한에 투항하겠다고 하고 3만의 세력을 끌고왔던 것이다. 3만 군대를 이끌고 왔던 발기는 연우가 보낸 동생 계수의 고구려군에 참패를 당한다. 계수는 형을 끝까지 쫒아갔고 발기는 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두 번째 왕후된 우씨왕후 

이후 연우는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 이렇게 우씨왕후는 고구려 고국천왕에 이어 산상왕의 왕후가 되었으므로 우씨왕후의 케이스는 우리나라 역사에 전무후무한 유일한 일이다. 

 

 

 

산상왕의 아내로 제 2의 인생을 살게된 우씨왕후였으나 산상왕 즉위한지 7년이 지나도 아이를 낳지 못한다. 오랫동안 후계자가 없었지만 산상왕은 후비를 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208년 11월 하늘에 제사 지낼 돼지가 달아났는데 주통촌이라는 마을로 들어갔는데 이 돼지를 아름다운 여인 후녀가 잡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산상왕은 후녀를 보려 그날밤 나갔고 첫눈에 반해 하룻밤을 보낸 후 궁으로 돌아왔다. 이후 우씨왕후는 후녀를 죽이려 사람을 보내고 괴롭혔으나 산상왕의 아들을 갖은 후녀를 산상왕은 후비로 맞아들이겠다고 하니 거절하지 못하고 후녀를 후비로 들었다. 그리고 후녀는 아들을 낳는다. 

 

우씨왕후의 권력은 언제까지? 

227년 5월 산상왕은 사망한다. 산상왕의 뒤를 이어 산상왕과 후녀의 아들 '교체'가 고구려 제 11대 왕 동천왕으로 등극한다. 동천왕 즉위 이후에도 우씨 왕후와 연나부는 여전히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우씨왕후는 두번의 왕후로 47년, 동천왕 이후 왕태후로 7년으로 약 55년간 고구려 최고의 권력자로 우씨왕후는 군림했다. 

 

우씨왕후를 몰랐던 이유 

고구려에서 형사취수혼을 한 아내는 본 남편의 옆에 묻히는게 관례였으나 우씨왕후는 유언으로 자신을 산상왕 옆에 묻어줄것을 유언했던 것이다. 고국천왕과의 관계는 이해관계에 따른 정략적 혼인이었고 본인의 의지대로 선택한 혼인이 산상왕이었다. 234년 9월 눈을 감은 후 산상왕 옆에 묻힌다. 우씨왕후 사망 후 약 1000년 뒤 조선시대에 우씨왕후에 대한 얘기는 유교적 논리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동사강목에 묘사된 우씨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