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민작전이란?
장사리 전투는 아군의 정보를 적에게 오판하도록 유도해 적을 유인하는 계획적인 작전활동으로 인천상륙작전의 기만작전이었다. 원래 상륙작전 시 기만작전을 병행한다. 제 2차 세계 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 작전 때도 파 드 칼레 혹은 스칸디나비아반도등 다른 지역으로 기만작전을 시행했다.
인천상륙작전의 기만작전은 여러개가 있다. 9월 12~14일까지 미군과 영국군의 양동상륙작전이 있었으나 큰 소득이 없이 끝난 전투였고 9월 14일 삼척에서 해안에 함포 사격등이 있다. 인천상륙작전 직전의 기만작전 중의 하나가 장사리 전투였다.
장사리 전투에 투입된 학도병
장사리의 위치는 포항 일대로 포항 기준 북쪽으로 약 25km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200고지를 탈환하고 보급로를 뺏기 위한 상륙작전이었다. 이때 투입된 학도병 인원은 67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장사리 전투는 기만작전의 일환이라 학도병 신상 기록이 밝혀지지 않았다. 장사리 전투에 참여했던 독립 제1유격대대를 만든 사람이 이명흠 대위로 그는 병력 부족으로 고민하던 중 상부를 설득 끝에 유격 대대를 창설하게 된다. 그래서 대구역 광장에서 대대원을 모집했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왔다. 그중 적합한 사람으로 200명을 선출, 밀양에서도 560명정도를 모집을 해서 총 772명으로 구성해 참전하게 된 것이다. 그 중에 80%가 학도병으로 67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14~18일간 훈련 후 바로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장사리 전투 전개 과정
당시는 일본발 미군 지원을 기다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운영할 병력 자원이 없었다. 작전 공식명은 작전 명령 174호였다. 실제 투입될 부대원들은 무슨 작전인지 잘 몰랐고 알고 있던 사람은 부대를 끌고 있던 이명흠 대위뿐이었다.
석탄을 싣고 날랐었던 문산호에 제 1 유격대대 대원들이 탑승하고 출동하게 된다. 전략과 시스템이란게 없었던 장사리 전투는 처참한 결과를 피할 수 없었던 과정이었다. 당시 태풍으로 해수면이 상승해 있었고 배에서 먼저 내렸던 1중대는 거센 물살에 휩쓸려가고 배 또한 좌초된 상태였다. 변변한 장비 없이 로프를 해안가로 던져서 상륙을 시도했다. 이렇게 상륙 과정 중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장사리 전투 의의
다행히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북한 제2군단의 주 보급로인 7번 국도를 차단하는데 성공한다. 전쟁이 끝난 후 학도병으로 구성된 772 유격동지회가 만들어졌는데 이때 맥아더 장군이 편지를 보냈다.
▼장사리= 장사 상륙 작전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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