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국군 참전이다. 6.25 전쟁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바로 중국군 개입때이다. 낙동강 방어선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오던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국군 제1군단의 진격이 계속되었다. 원산도 점령하고 전쟁이 끝난 것처럼 보였으나 갑자기 인민지원군이라는 중국군 26만명이 전쟁에 개입한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밀려내려오게 되면서 1950년 11월 27일 미국과 중국의 전면전 장진호 전투가 벌어진다. 미국이 중국군과 처음 싸운 전투로 미 해병 1사단은 1만 2천여 명정도였고 중국군은 12만명이었다. 10배 많은 중국군을 상대로 굉장히 힘들었던 상황이었다. 무려 14일간 사투를 벌였던 전투이다. 미국 전쟁사에서 미군이 가장 고전한 전투로 기록된 곳이고 패배한 전투지만 피해를 최소화한 성공적 전투 사례이기도 하다.
장진호는 북한 함경남도 장진군에 있는 인공호수이다. 1934년 일제 강점기때 일제가 만들어 놓은 인공호수로 흥남 질소비료 공장에 전기 공급이 목적이었다. 미군은 이 장진호 전투에서 많은 고생을 한다. 이곳은 개마고원 입구로 한반도 북부에 위치한 고원지대로 지형적 특성상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이다.
당시 상황은 도로가 모두 얼어붙은 상황이었고 이미 12만의 중공군과 1만 3천의 미군은 수적으로도 열세였
다. 이미 포위를 당한 상태였고 식량 보급도 불가능한 최악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미 제1 사단이 장진호 전투에서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에 대부분 부대가 무사히 철수를 할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는 역사상 가장 추운 곳에서 벌어진 세계 3대 동계전투 중 하나이다. 첫 번재는 독소 전쟁에 있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이고 두 번째는 모스크바 공방전이다. 그리고 세 번째가 장진호 전투로 당시 기온은 영하 30도였다. 무려 미군 사상사 3637명 중국군 사상자 2만4천명으로 수적 열세에 후퇴를 감행하며 북한 피란민 10만여 명을 구출하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였다.
미 해군 제 1사단은 이미 중공군이 장악한 남쪽으로 내려 갈수가 없었고 살아남을 방법은 오직 해상 탈출뿐이었다. 유일하게 점령되지 않은 항구가 흥남부두였다.
▼흥남부두 철수작전 : 메러디스 호의 기적
1.4후퇴를 하면서 서울에서 부산으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1.4후퇴때는 다시 서울로 북한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많은 이들이 피란을 가게 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다보니 그 와중에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기게 된다.
▼장진호 전투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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