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당시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해 반격에 성공하면서 전쟁이 크리스마스 전에 끝날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대혼란에 빠지게 되고 강원도 쪽으로 올라가던 부대의 경우 퇴로가 차단되는 위기에 처하게 되자 흥남 항구를 통한 철수 작전을 계획한다. 함흥과 흥남 일대를 제외하고 함경도 전역이 중공군이 점령한 상태였고 항구에서 배로 도망갈수 밖에 없었다.
시간을 벌기 위해 몇 개 부대는 희생을 하게 된다. 흥남 철수 작전을 위해 장진 일대에서 미국 제 해병1사단과 중공군간의 전투가 벌어진다.
미군과 UN군은 천신만고 끝에 흥남부두에 도착한다. 미 제 10군단과 국군 제 1군단 10만 병력이 철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피란민 20만명이 몰려들게 된다. 당시 미군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을 괴멸시키기 위해 함경도와 만주지역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계획하고 실제로 삐라를 살포한다.
이에 5년전 히로시마의 비극을 너무 잘알고 있던 함경도 주민들은 원자 폭탄에 대한 두려움으로 피난길에 올랐고 흥남부두로 몰려왔던 것다. 1950년 12월 23일 모든 부대가 철수하고 마지막 한대의 수송선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만 남는다.
이 배는 사람을 태울수 있는 배가 아닌 군용 수송선으로 승선 정원은 고작 30명이었다. 철수를 위해 탱크와 장갑차등 군수송장비를 이미 모두 싣고 있었다.
흥남철수작전 당시 피란민을 구출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화물선이라 정원이 30명 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 흥남부두 철수 작전을 이끈 장군은 미 육군 소장 알몬드였고 당시 통역을 맡고 있던 현봉학 박사가 피란민을 태워달라고 부탁하게 되고 이 배에 탱크와 장갑차가 이미 실어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봉학 박사는 끈질기게 설득했고 고민하던 알몬드 소장은 피란민을 태우기로 결정한다.
차량 1만 7천여 대 군수물자 약 35만 톤이 철수하고 있었는데 알몬드 소장은 이를 모두 버리라고 명령한다. 화물 대신 피란민을 태운 것이다. 철수 작전에 없었던 피란민 1만 4천명을 태우고 우여곡절 끝에 출항한다. 그리고 흥남부두는 폭파시켜 버린다. 출항한 배는 부산항에 도착한다. 그러나 부산항 입항 불허를 받게 된다. 부산은 이미 난민이 많아 14,000명 수용불가 상태였다. 이에 3일간 항해 후 거제도에 도착했다. 이 배는 1만 4천여 명의 피난민을 구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상구조를 한 기적의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드라마틱하게 거제도 도착한 날이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승선 인원이 14000명이였는데 도착 당시 14005명이 되었다. 5명이 배 안에서 태어났고 그들의 이름은 김치 1, 2,3,4,5 라고 지었다. 거제 장승포항에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기념하는 길이 있고 당시 배에서 내린 난민들이 장착해서 살고 있다.
또한 김치 1, 2,3,4,5 가 운영하는 식당들도 이곳에 위치해 있다.
제 2차 세계대전 초 민간의 선박과 요트를 동원해 연합군을 철수시킨 됭케르크 철수 작전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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