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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강릉 무장 공비 잠수함 타고 온 26명은 어떻게 되었나?

1996년 9월 18일 강원도 강릉, 택시기사 이씨는 손님을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한참을 가는데 고속도로 갓길에 두남자가 있다. 고속도로에는 사람이 걸어다니지 않는데 두명의 군복입은 남자가 있다. 뭔가 수상함을 느낀 택시기사는 손님을 내려드리고 다시 남자들이 발견되었던 인근도로로 가서 내려서 살펴봤다. 

 

강릉 무장 공비 침투 사건 

 

강릉 잠수함 발견 
그런데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났고 빨간 불빛과 검은 연기가 나는 해변으로 갔다. 그것은 잠수함이었다. 그래서 택시기사는 곧바로 신고를 했다. 진도개 하나가 발령되었고 잠수함은 북한잠수함이었다. 곧바로 UDT 대원들(=해군 특수부대)이 투입되었다.  

 

 

1996년 발견된 강릉 잠수함 모습

 

잠수함 내부
해안에서 잠수함까지는 20m 거리였고 잠수함으로 들어간 대원은 본격적으로 내부 수색을 했다. 잠수함 내부는 너무 조용했다. 그런데 잠수함내부에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총은 기본 수류탄 100개이상 발견되었고 대전차 로켓포까지 중무장되어 있었다.  택시기사가 맡은 탄 냄새는 남아있는 서류를 불태웠던 것이다.  

 

잠수함에서 발견된 수류탄 및 RPG-7 대전차 로켓포

 

11명의 시신 발견

인근 해안도로에서 무장공비의 흔적을 찾아냈다. 어림잡아도 10명이 넘어보였다.  공비들은 내륙으로 이미 침투했다는 것이다.  인근부대 군인들이 총동원되었고 수색에 돌입했다.  그런데 총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능선따라 갔더니 11명의 남자들 시신이 일렬로 있었던 것이다. 11명 모두 무장공비였고 그들의 몸에서 유서가 나왔다. 김정일에게 보내는 충성의 자살 유서였다. 그러나 11명의 무장공비는 다른 공비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조타수 이광수 생포

그리고 경찰서로 수상한 사람이 나타났다는 신고 전화가 왔고 바로 출동을 했다. 그리고 1명의 무장공비를 생포했다. 그는 잠수함 조타수였다. 이광수 조타수는 먹을것을 구하기 위해 민가에 내려왔었고 그에게 정보를 얻기 위해 원하는 것을 물었더니 이광수는 광어회가 먹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는 집집마다 전화가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광어회를 배달해 줬다. 그는 서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광수 생포

 

북에서 내려온 26명의 무장공비 

 

무장 공비 14명 남음
정찰임무를 띄고 강릉에 내려왔으나 잠수함이 암초에 걸리는 바람에 해안가에 갇혀버린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26명이 내려왔다고 한다. 무려 14명이 더 있다는 것이다. 

 

첫째 날 7명 사살
다음날 새벽부터 곳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항복하는 공비는 한명도 없었다. 하루 만에 공비 7명을 사살했고 우리군인도 한명이 전사, 2명이 부상을 당했다. 무장공비 침투 3일째 권오택 강정영 상병이 산에서 매복 중이다가 다음날 헬기를 타고 산 정상으로 이동했다.  

 

 

 

2명의 공비 사살

산 정상은 9월 말이라 너무 추웠다. 다음날 낙엽밟는 소리가 났고 암호를 비둘기라고 했으나 대답을 못했다. 다가오는 사람을 살펴보니 할아버지같은 모습이었고 공비같지 않았다. 그래서 입산통제 구역이라 알리며 다가가니 갑자기 총을 쐈고 강상병은 그자리에서 쓰러졌다. 이에 권오택 상병은 엎드려서 수류탄을 던졌고 수류탄에 맞아 공비는 사망했다.  강상병은 머리에 총을 맞아 후송 중 사망했다.

 

병원 후송 중 사망한 강정영 상병

 

무장 공비 회유 작전- 2명 사살
이날은 강정영 상병을 비롯해 3명의 국군이 전사했다. 공비 2명을 사살하고 5명의 공비가 남아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5명의 공비를 찾을 수가 없었고 이에 생포된 이광수의 목소리와 전단지를 뿌려 설득하려했으나 한명도 자수하지 않았다. 공비 두 명이 발견되었으나 끝까지 저항을 했고 2명 모두 사살되었다.

 

이광수 친필이 들어간 공비 회유 전단지
이제까지 생포된 북한 간첩의 근황 전단지

 

남아 있는 3명의 공비는? 
남은 3명의 공비는 흔적이 없다. 10월 8일 10일째가 되었고 입산 금지가 해제가 되고 강원도 춘천에서는 전국체전을 개최하고 있었다. 강릉시에서 70km 떨어진 평창군 탑동리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유광렬씨는 산에 올라간 친구가 내려오지 않는 상황에 경찰에 신고를 했고 군인들은 수색에 들어갔다. 낙엽을 들추니 같은 마을 할머니가 머리에 상처가 심해 쓰러져 낙엽에 덮여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남자 2구의 시신도 발견되었다.  산에 갔던 유갑열의 친구였다.  

 

2명 사살

11월 4일 28일 만에 공비를 목격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강원도 인제 서화면이었고 공비의 목적지는 북한이었다.  서화면으로 총출동을 했고 설악산 국립공원 입구 연화동 계곡이었다. 병사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고 수상한 사람이 다가온다. 암호를 불렀으나 자신은 '선임하사'니 나와 보라고 국군을 유인했고 이에 밖으로 나간 군인은 그가 공비임을 직감했다. 총격전이 벌어졌고 수상한 발자국을 확인하는 순간 총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영안 대령이 전사했고 병사한명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추격 4시간만에 공비 2명을 사살하는데 성공했으나 우리군도 3명이 사망했다.  




표일병의 죽음 
이 소식은 전국으로 보도되었고 산에서  작업 중 실종된 표종욱 일병이 군에서 탈영했다고 했었다.  표종욱 일병 누나는 저녁 뉴스를 보고 있는데 자신이 동생에게 사준 노란색 시계가  공비를 사살한 현장 노획 유류품에서 섞여 있었던 것이다.  노란색 테두리의 조금 특이한 시계를 동생에게 사줬던 것이다.

 

표일병의 시계

 

이 시계를 공비들이 가지고 있었다.  다음날 부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표종욱 일병이 산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실종된 장소에서 500M 떨어진 곳에 낙엽에 덮여 있었고 속옷만 입고 있었다고 한다. 공비들이 살해 후 군복과 물건을 빼앗아갔던 것이다. 그제야 군대에서 탈영으로 몰아서 죄송하다는 사과를 했다고 한다. 

 

남은 1명의 공비는 어디로? 

이제 남은 공비는 단 1명이었다. 그러나 이 공비는 북으로 넘어간것으로 추정된다. 

무장공비의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공비들의 소지품에서 군부대나 주요 시설을 찍은 사진들 뿐이었다. 그리고 북한의 반응은 훈련 중이던 잠수함이 기관고장으로 표류하다가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라는 주장이었고 잠수함과 승무원을 돌려보내라고 협박을 했다. 그러다가 사건 종료 12월에는 미국의 중재로 북한이 공식사과를 했다. 그리고 우리정부는 무장공비 24명의 유해를 북한으로 넘겨줬다. 그리고 유일한 생존자 조타수 이광수는 본인의 뜻에 따라 한국에 귀순했다. 

이렇게 강릉무장공비사건은 끝난 줄 알았으나 14년이 흐른 2010년 북한이 난대없이 영화 한 편을 공개한다. 자폭 영웅이라는 타이틀로 만들어진 영화였다. 49일간 일어난 전투에 27명이 부상을 당하고 18명의 희생자가 생겨났다.

 

이광수를 제외한 25명의 공비 얼굴



[꼬꼬무 38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