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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진주성 이야기 김시민(1차 진주대첩), 황진장군(2차 진주성 전투)

임진왜란 3대 대첩하면 한산도 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이 있다. 진주대첩은 1차 진주성 전투를 진주대첩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잘 알려진 논개는 2차 진주성 전투의 등장인물이다.  1차 진주성 전투와는 달랐던 2차 진주성 전투은 조금은 낯설고 충격적 패배 이야기가 있다.

 

진주성
진주성 입구


1차 진주대첩 

1592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부산을 지나 한양으로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일본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조선군이었다. 그러나 부산에서 갑자기 일부 방향을 튼 일본 병력은 진주성으로 향했다.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한 이유

일본이 진주성을 향한 이유는 바닷길로 이동하며 물자 조달을 하려고 했던 계획은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막혀버리게 되자  호남 전라도 곡창지대를 가기 위한 길목에 진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호남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진주였기 때문이다.



진주 주변부에는 의병장 곽재우, 김면등이 활약하고 있었고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은 진주성을 중심으로 관군을 모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식량확보와 조선군 세력 해체를 위해서 반드시 진주를 장악해야 했던 일본군이었다.  이렇게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진주였다. 

 



당시 우리나라 병력은 일본의 1/10 정도였으나 공성과 수성의 전투로 가능성이 있었고 진주성의 둘레는 임진왜란 첫 격전지 부산진성 둘레 511M의 병력 3천 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부산진성의 5배 둘레의 진주성은 2750M로 최소 만 명 이상의 군사가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3천8백 명으로 2~3만 명을 상대해 성을 지켜낸 진주대첩은 의미가 큰 것이다.

 



진주성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진주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성으로 그때 진주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선에 있었던 진주였다. 고려시대에는 촉석성이라 불렀었다.  고려 말에 왜구들의 침입이 남쪽에 잦았고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려 우왕 5년에 흙으로 쌓았던 토성을 돌로 쌓은 석성으로 개축했다.  지금의 진주성은 고려 말 개축된 성을 원형으로 복원된 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은 지금의 약 3배정도 컸다.


진주성은 남쪽에는 남강이 흐르고, 서쪽에는 산이 있다.  천혜의 요새이자 엄청난 크기의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산대라는 도구를 이용해 성벽에 달라붙어 올라갔고 우리 백성들은 가마솥에 물을 끓여서 펄펄 끓는 물을 그대로 들이 부으면서  처절한 전투 속에 진주성을 지켜냈던 현장이었다.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진주성을 지켜냈던 백성들이다.

동쪽이 약한 부분, 남쪽은 남강,  서쪽은 절벽, 그래서 동쪽과 북쪽으로 쳐들어왔다.
진주의 젖줄 남강 옆에 있는 진주성
서쪽은 절벽이 방어
북쪽은 인공 물길 해자로 막혀있었다.

 

현재도 진주성의 원형과 규모를 알수 있는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사가지의 밑에서 발견된 진주성 옛터가 발견되었다. 고려시대 토성~조선 시대 성벽이 발견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은 지금의 약 3배 정도 컸다.  

 



김시민 , 진주 지역의 설화 
당시 워낙 왜군의 수가 많아 일반 백성들도 함께 나와 싸웠고 이때 돌팔매꾼 조씨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조 씨의 돌팔매질에 맞고 쓰러진 일본군이 백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진주성을 지켜내겠다는 백성들의 염원을 알 수 있다. 이런 백성, 관군, 의병을 한 힘으로 모았던 이가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다. 진주대첩의 김시민 장군의 시호도 충무공이었다.  조선시대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사람은 이순신, 남이, 김시민을 포함 9명이었다.  

이때 김시민 장군은 여러 심리전을 펼리기도 했다. 구슬픈 피리 소리로 적군의 마음을 동요했고 성내의 노약자, 여성들에게 남성의 복장으로 갈아입혀 군사가 많도록 했다.  

 


이런 진주 목사 김시민을 일본인이 발음한 것이 모쿠소인데 일본의 문학작품에서 모쿠소는 대부분 죽임을 당하는데 김시민 장군에 대한 공포심이 문학작품으로 표현된 것 같다.

 

*목사: 고려, 조선 시대 지방의 행정단위인 목에 파견되었던 지방관


1차 진주성 전투는 승리했으나 김시민 장군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러나 이 전투의 승리도 곡창지대인 호남지역을 수호했고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김시민 장군은 39세의 나이로 전사 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김시민장군이 살아있었다면 2차 전투의 양상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2차 진주성 전투

 

1차 진주성 전투 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임진왜란이다. 전쟁에 명나라가 개입한 것이다. 이들은 조선 땅에서 협상에 나선다.  그리고 이 협상에서 퇴각을 약속했던 일본군이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1년 만에 다시 진주성으로 진격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그다음 해에 명나라의 개입으로 일본과 명의 협상이 진행되었고 이때 일본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일대를 명에게 넘기라고 했고 이런 협상 진행 중 병력 9만여 명이 진주성으로 다시 진군한 것이다.

2차 진주성 공격 이유
이때 히데요시는 전년도 공격에 실패한 성이므로 한사람도 남겨놓지 말고 죽이라고 명령했었다. 협상은 진행 중이었으나 조선에 여전히 주둔 중이던 일본은 군량확보를 위해 여전히 호남 지역이 필요했고 유리한 협상을 위해 위력 과시를 위해 복수심과 전략적 목적에 의해 2차 진주성 전투가 이뤄진 것이다. 군사 전량상 가장 무의미하고 잔혹하기만했던 2차 진주성 전투였다.

2차 진주성 전투 일본군 병력은 약 9만여명이었고 조선군은 1만 5 천군이었다. 이런 병력차이에 조선군내에서도 의견이 나눠졌다. 승산이 없으나 성을 비우자는 의견과 성을 지키겠다는 의병이 있었다. 1차 진주성 공격 때는 진주성에 3천8백여 명 + 외부 병력. 의병 등 4~5천 명이 지원을 했었다. 그래서 일본군의 전력이 분산되어 있었으나 2차 진주성 전투는 외적지원이 전혀 없었다. 

2차 진주성의 전개 과정 (1593년)

- 6월 21일 일본군 진주성 포위
- 6월 22일 3번에 걸친 공방전 전개 새벽 4시 일본군 퇴각
- 6월 23일  적들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해자를 일본군이 메우기 시작 그리고 토성을 그 위에 쌓아서 성안을 향해서 공격하기 시작, 9만 병력이는 것은 이런 해자를 메울 수 있을 정도의 대군의 병력이라는 것이다. 

이때 조선군을 이끌고 있었던 황진 장군(황희정승 5대손) 은 성위에서  언덕을 만들어 더 높은곳을 확보하려 했다.  이에 일본군은 귀갑차를 만들어 작전을 변경. 날카로운 물건으로 성벽을 뚫거나 들어내어 성을 허물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1차 전투와 달리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지원군이 오지 않았다.  명나라의 지휘부가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 6월 28일 2차 진주성을 지휘하던 황진장군이 총에 맞아 전사
 

황진 장군은 누구? 

황진장군은 일본군이 호남지역 저지했던 또 하나의 전투였던 권율장군의 이치 전투때 황진 장군도 참전했고 부상당한 황진 장군이었고 2차 진주성 전투 당시 황진 장군은 충청병마절도사였다.  이에 의병장 선거이가 진주는 장군의 관할구역도 아니고 지원 명령도 없으니 진주를 가지 말라고 만류를 했음에도 황진 장군은 진주성에 와서 끝까지 싸우다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실질적 지휘관이었던 황진 장군의 전사로 조선군의 사기가 꺽이게 되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당시 조선은 장마철을 맞아 진주 일대의 지반이 약해져 동문 쪽 성벽과 북쪽 성벽이 무너지면서 일본군은 진주성으로 난입하게 되고 결국은 함락당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약했던 동쪽이 가장 치열한 전투가 일어난 곳 이곳은 2차 진주성 싸움때 결국 함락되고 만다.

 

 

결사항전 
무너진 진주성 안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수성전의 성을 의지해서 싸우는 것과 성벽 없는 백병전은 철저한 숫자 싸움이었다. 조선군은 끝까지 싸웠으나 대부분의 조선군이 전사하게 되고 천의사 김천일, 아들 김상건 경상우병사 최경회, 의병장 고종후 최기필은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나라를 지켜고 싶었던 조선의 군사들이었다. 

이때 2차 진주성 전투 후 의기 논개도 일본군 장수를 끌어안고 투신했다.

 

 

 

김시민 장군 진주대첩 & 진주성 촉석루의 논개 이야기 (남강유등축제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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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백성 학살과 납치 
1차 진주성에서 승리하면서 진주성은 안전한 곳이라는 인식이 백성들 사이에 각인되었고 2차 진주성때 백성들은 진주성으로 모두 피신을 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명령은 한 명도 남김없이 죽이라는 것이었고 명령에 따라 진주성에서 학살을 자행한 일본군이었다. 이때 학살당한 조선인의 숫자는 6만명이었다. 일본 측 기록에도 4만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전국시대를 통일하며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이렇게 까지 많은 사람을 학살한 적은 없었다.  또한 일본군이 학살만 했던 것이 아닌 진주민들을 일본으로 납치해 갔던 기록도 있다. 

 

조선 숙종대 통신사 제술관 신유한이 남긴 해유록에는 오사카 요도 강변에 진주도라는 곳이 있고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일본 고치시의 명물 도진도후라는 두부가 있다. 도진도후 두부제조법을 전한 사람이 바로 조선인 박호인이다. 일본식 부드러운 두부와 달리 조선식의 단단한 두부 제조법을 전수했던 사람이 2차 진주성에서 사로잡혀 일본에 끌려갔던 박호인이라는 얘기가 있다. 

 

 



2차 진주성 전투 때 먹었던 진주비빔밥은 무엇? 

진주비빔밥과 선짓국 유래 (진주 맛집 제일식당) 꼭 먹어보자.

 

진주 비빔밥과 선짓국 유래 (진주 맛집 제일식당) 꼭 먹어보자.

옛날 진주는 사람이 아주 많았고 물산이 풍부했던 대도시였다. 서부 경남의 진주는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 진주 중앙유등시장은 새벽시장과 상설시장이 공존하는 136년 역사의 시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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