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390회 >
문무왕 22세 때 문무왕의 아버지 김춘추 나당연합을 성사시켰다. 당시 신라를 압박하고 있던 백제 의자왕으로 인해 왜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던 김춘추였으나 모두 거절했고 당나라로 발길을 옮겨 당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645년 안시성 전투에서 고구려에 대패한 당나라도 신라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에 648년에 나당연합이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을 아들 문무왕은 옆에서 지켜보며 배웠던 것이다.
그러나 김춘추가 돌아온 지 2달 만에 당 태종이 사망하면서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로 인해 진덕여왕을 움직여 비단에 수를 놓아 태평송을 당에 보냈고 이 태평송을 당시 20대였던 김법민(문무왕)이 직접 바쳤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고 이 과정에서 문무왕에게 모멸감을 준 사건이 발생한다. 665년 8월 공주 취리산에서 백마의 머리가 얹힌 제단 앞에서 신라 문무왕과 패망한 백제 부여융이 마주 서게 된다. 당 황제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웅진도독에 임명하고 억지로 화친을 시킨 것이다. 힘들게 정복한 백제를 동등한 위치에서 마주하게 된 순간이었다. 당시 대국이었던 당 황제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기에 문무왕은 이를 따라야 했던 것이다. 이에 문무왕은 당에 맞설 힘을 기르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나당전쟁
당은 웅진도독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신라에 663년에 계림 대도독부까지 설치하면서 백제와 마찬가지로 신라를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문무왕은 이를 참아내고 당과의 관계를 이어갔고 고구려 멸망 한 달 전 문무왕은 왜에 사신을 보내 당과의 전쟁을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패망한다. 같은 해 당나라는 평양 근처에 안동도호부를 세우고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드러내니 이에 결국 2년 뒤 670년 문무왕은 당을 향해 선제공격을 하기에 이른다. 신라는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요동의 오골성으로 진격했다. 이것은 7년간 이어진 나당전쟁의 시작이었다.
나당 전쟁을 위한 근거 이유
고구려는 신라와 손을 잡게 된다. 당은 고구려 유민 15만 명을 당의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기 때문에 이곳을 탈출한 고구려 왕족 안승이 신라에 투항했고 신라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문무왕은 직간접적으로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한다. 이에 분노한 당 고종은 장수 설인귀를 파견해 문무왕을 비난, 신라 정벌에 대한 협박을 외교문서로 보냈고 이에 문무왕은 당태종이 평양 이남 백제 토지를 주겠다는 당태종의 약속이 있었다는 내용의 < 답설인귀서 >를 보낸다.
이 <답설인귀서>는 삼국사기에만 기록이 남아있어 중국 측에는 믿을 수 없다고 얘기를 하지만 답설인귀서는 문무왕의 공식문서로 충분한 근거를 가진 밀약문서인 것이다. 당 태종과 합의하고 신라에 돌아온 김춘추가 밀약 사실을 공식 문서로 기록해 놓지 않았을까 예측된다.
석문전투
672년 황해도 일대에서 신라 장군 효천과 당군이 맞닥뜨린다. 전투 초반 고구려 보은군과 함께 신라군은 기세를 올리게 된다. 후퇴하는 당군을 쫓아 문 벌판까지 이르게 되지만 그것은 당군의 함정이었다. 당군의 기만전술에 역습을 당하게 되고 결국 석문전투에서 지휘관 7명이 사망하며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신라였다. 나당전쟁 개전 후 최악의 위기를 맞은 문무왕이었다.
이에 문무왕은 당에 사죄의 문서를 보내고 이로 인해 시간을 벌어 전열을 가다듬는다. 다시 전쟁준비를 하기되고 나당전쟁은 끝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천성전투
675년 천성에서 신라와 당나라는 최후의 전투를 하게 된다. 신라군은 이 전투에서 당군 1400명의 목을 베고 함선 40척을 탈취하는 대승을 거둔다. 당 수군이 참패하면서 보급로가 차단된 당나라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전세는 신라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곧이어 벌어진 매소성 전투에서 20만 당군에 맞서 신라 3만 군은 승리를 거둔다. 노획한 말의 숫자만 3 만필이 넘었다. 이듬해 676년 기벌포 전투에도 승리를 이어갔고 이렇게 나당전쟁은 끝이 나면서 문무왕의 삼한일통의 대업을 완성한다.
역사교과서에는 나당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매소성 기벌포 전투로 묘사하고 있으나 다른 전투 못지않게 천성전투도 중요했다. 천성은 서해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당의 수군 보급로를 차단시키면서 이후 전투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당 전쟁당시 당 내부의 여론도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토번(7~9세기 중엽 활동한티베트왕국)이강렬한 기세로 당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신라와 토번 양쪽에 전쟁을 치러야 했던 당은 전쟁을 끝내길 원했고 예성강 이남지역까지 영토를 신라는 차지한다. 그러나 평양까지는 가지 않았다. 이는 당에 침공의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후 발해가 등장하면서 당나라는 평양 이남지역은 신라에 영유한다는 인정을 하게 된다. 나당전쟁으로 한반도에서 당나라를 몰아내고 삼한일통의 국정과제를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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