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orean History

문정왕후는 태릉에 왜 홀로 묻혔나?

반응형

[역사저널 392회]   

태릉의 상징 중 하나는 태릉선수촌 1966년 6월 국가대표선수의 강화 훈련을 위해 설립된 종합 선수합숙훈련장이 있고 태릉갈비도 유명하다. 또한 문정왕후 단릉인 태릉이 있다. 조선 왕릉은 총 15기의 단릉이 있는데 그 중에 왕비 홀로 묻힌 단릉은 총 12기가 있다. 12기의 왕비 단릉 중 태릉이 가장 큰 것이다.  

 

태릉 : 문정왕후 능
태릉 조선 11대 왕 중종의 세 번째 왕비



그렇다면 문정왕후의 능이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며 왜 홀로 묻히게 되었을까?  사실 문정왕후는 남편 중종의 능이 있는 정릉에 묻히고 싶어했다. 그러나 중종과 약 14km 나 떨어져있는 곳에 홀로 묻히게 된다.  

 

태강릉과 선정릉 거리

 

문정왕후 비판하는 이유

조선왕조 기록에는 문정왕후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록에 실린 문정왕후 묘사



암탉 문정왕후로 인해 나라가 망한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비판의 이유는 아들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고 또 다른 이유는 남편 중종의 능을 옮긴 것이다. 조선의 왕비 중에 남편의 무덤을 강제로 옮긴 사람은 문정왕후가 유일하다. 또한 태릉은 왕비의 왕릉 중 병풍석, 난간석을 다 갖춘것은 문정왕후의 능이 유일하다. 병풍석이 12지신을 새겨놓은 것은 물론 석물의 크기가 3m가 넘는다.  

 

태릉 크기
태릉 석물 3m 높이

 

문정왕후는 어떻게 왕비가 되었나?
 중종은 총 세번의 비를 맞이했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세번째 비였다. 첫 번째 왕비는 단경왕후로 비가 된지 7일만에 쫓겨난 불운의 왕비이다.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서 박민영 배우가 맡았던 역할이 단경왕후이다. 그 이후 장경왕후 윤씨가 들어왔고  아들을 낳고 8년만에 산후병으로 죽고 만다. 그리고 문정왕후가 세번째 왕비가 된다. 장경왕후가 낳은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윤씨 집안에서는 같은 집안 출신인 문정왕후 윤씨를 왕비로 들인 것이다.   

원래 유력한 왕비 후보는 경빈 박씨가 있었으나 경빈 박씨는 연산군때 '흥청' 출신이라는 결정적 흠이 있었다.

 

흥청이란..

 

그래서 최초로 계비를 외부간택으로 뽑은 사람이 문정왕후였던 것이다. 장경왕후와 같은 파평윤씨였으나 상대적으로 문정왕후는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문정왕후 어떻게 권력을 잡았나? 

문정왕후는 총명하고 문자를 알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왕비 중 문자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실제로 대신들과 토론을 할때 전혀 밀리지 않았다. 문정왕후는 장경왕후가 낳은 아들 인종을 친자식처럼 아끼고 보살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과의 사이에서 딸만 낳다가 17년 만에 아들을 낳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문정왕후는 달라진다.

 

대윤 VS 소윤

문정왕후가 아들을 낳자 궐내세력은 둘로 나눠졌다. 장경왕후 세자의 세력은 대윤, 문정왕후 아들 세력은 소윤이었다. 대윤, 소윤의 공통점은 모두 외삼촌들이었다. 인종의 외삼촌 윤임, 명종의 외삼촌은 윤원형이었다.  

 

 


인종이 왕이 되지만 후사가 없자 문정왕후의 아들도 후계구도의 중심이 된다.  그러나 인종의 외삼촌 윤임은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을 견제했고 윤임에 의한 목숨의 위험을 느껴 명종은 매일 처소를 옮겨가며 생활했다.  

 

인종 사망

1544년 중종이 승하하고 세자였던 인종은 곧바로 왕위를 물려받고 어머니 장경왕후가 잠들어있는 희릉에 중종을 모신다.  그러나 즉위 8개월만에 인종도 승하한다. 이 때문에 문정왕후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기록에 남아있는 인종의 사망 원인은 인종은 효자여서 아버지 중종의 상을 온몸을 다해 치렇기 때문에 극도로 쇠악해져 사망했다. 는 것이다.  인종은 후사가 없어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문정왕후 수렴청정 (권력의 중심에 서다)
 그리고 명종이 왕위에 올랐던 나이는 12세였다. 그래서 어린왕을 대신해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권력의 핵심이 된다. 문정왕후는 죽을때까지 동생 윤원형등 친인척을 적극 등용해 실권을 장악했다.  

 

 

 

문정왕후가 중종능을 옮기려는 이유 
문정왕후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수렴청정 7년 후 명종이 19살이 되던 해 드디어 중종의 왕릉을 옮기기로 결정한다. 원래 중종의 능은 경기도 서삼릉에 있었다. 그곳에는 중종 ,  2번째 비 장경왕후 (희릉) - 인종(장경왕후 아들) 이 있었다. 문정왕후는 중종 옆에 묻히길 원했고 장경왕후와 떨어뜨리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문정왕후가 내세운 천릉의 명분은 성종의 능인 선릉 옆, 중종의 아버지 옆으로 모셔야 한다.  또한 풍수지리상 좋지 않은 땅이라 좋은 곳으로 옮기겠다는 명분이었다. 실제로 당시 첫번째 묘소에 장마 때면 물이 찼다는 기록이 존재했다.  

 

문정왕후가 홀로 태릉에 묻힌 이유 

천릉이 결정된 것은 1522년 명종 7년때 지만 실제로 천릉이 이루어진 것은 명종 17년 1562년인 명종 말년이다.  이렇게 긴시간 동안 반대를 무릎쓰고 남편 중종을 삼성동 봉은사 옆 정릉으로 옮겼다. 그러나 막상 자신은 정릉에 묻히지 않았다.  정릉은 지대가 낮아 조금만 비가 오면 재실까지 강물이 넘쳤다.  선정릉 이 지역은 지금도 상습 침수구역이다.

 

선정릉 상습 침수 구역

 

정릉 천릉  3년후 문정왕후는 사망한다. 문정왕후는  중종 옆에 묻히겠다고 했으나 아들인 명종의 대신들이 침수가 심하다는 이유로 반대를 했던 것이다. 문정왕후가 그토록 바랬던 중종 옆에 묻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묘자리 결정은 살아있는 자의 몫인 것이다. 그래서 문정왕후는 중종 곁이 아닌 태릉에 홀로 묻히게 된다. 이 선택으로 중종의 3명의 왕비는 모두 다른 곳에 묻히게 되었다. 

 

중종과 3명의 왕비 왕릉 거리


결과적으로 장경왕후와 중종을 떼어놓겠다는 문정왕후의 의도는 반쯤은 성공한 셈이다. 명종은 문정왕후 사망후 2년 뒤에 숨을 거두고 엄마를 따라 태릉옆 강릉에 묻혔다.  

 

태강릉

 

이렇게 능을 옮긴 탓에 2년뒤 문정왕후 사망, 또 2년 뒤 명종 사망하니 이것이 모두 능을 옮긴 탓이라고 했고 임진왜란때 정릉이 왜적에게 도굴을 당했다. 임진왜란때 성종과 중종의 능이 훼손되었다. 결국 이 원인을 문정왕후가 제공했다는 얘기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