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7일의 왕비는 조선 11대 왕 중종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이다. 연산군 이복동생 진성대군 중종은 총 3명의 비를 맞이하게 되고 박민영 배우가 했던 역할이 단경왕후(1487~1557)로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이다.
단경왕후 집안
단경왕후 신 씨는 익창부원군 신수근과 청원부원군 한 씨의 딸로 조선시대 역대 왕비 중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왕비이다. 그녀의 집안 거창 신 씨는 성종과 연산군 때 권력을 잡고 있던 최고의 명문가로 그녀의 고모는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 씨, 아버지 신수 군은 좌의정으로 연산군의 처남, 작은어머니가 예종의 비 안순왕후의 여동생일 정도로 조선 역대 왕비를 통틀어 보기 드문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리고 단경왕후는 13세의 나이에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과 혼례를 올리게 된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전까지 7년 동안 행복하게 살았다.
중종반정과 단경왕후 폐위 이유
연산군이 폭정을 일삼자 그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옹립하려 했고 연산군 12년 1506년 중종반정으로 19세의 나이로 중종은 조선11대 왕이 된다.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중종반정 당시 좌의정이었던 신수근의 누이이자 연산군의 왕비도 자동적으로 폐비가 된다. 연산군 최측근의 딸 적폐세력의 딸을 그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산군대에 좌의정이자, 왕의 처남인 신수근을 죽이게 되고 중종의 의사와 상관없이 신수군의 딸인 단경왕후는 폐위되었던 것이다. 훗날 단경왕후가 권력을 잡았을 때 아버지 신수근의 복수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중종은 또한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반정 공신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단경왕후는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폐비가 되어 궁궐에서 쫓겨나게 된다. 사실 세종대왕도 같은 입장에 있었다. 세종 즉위 직후 역모죄로 당시 장신이었던 심온이 처형을 당했다. 역적의 딸 왕비를 폐위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세종은 왕비를 지켰고 세종의 아버지 태종도 거부를 했다.
인왕산 치마바위
쫓겨난 단경왕후에 대한 공식기록은 없다. 다만 단경왕후와 중종의 금실은 좋았다. 쫓겨난 이후에 단경왕후는 인왕산 아래 사직골에 기거하면서 중종을 그리워했는데 중종이 자주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자락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단경왕후가 인왕산 정상에 올라 자신의 붉은 치마를 걸쳐 놓았다는 전설이 있다. 인왕산 치마바위는 단경왕후가 걸쳐놓은 치마의 주름과 같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치마바위 전설에 유래된 인물이 단경왕후이다.
세월이 흘러 반정을 도모하고 단경왕후 폐위를 주장한 이들이 죽은 후 계비로 들어온 장경왕후 윤 씨가 9년 만에 산후병으로 사망하자 단경왕후를 다시 왕실로 불러들이자는 여론도 있었으나 그녀가 복위를 한다는 것은 중종반정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일이었고 신 씨가 복위해 왕자를 낳으면 후계구도가 복잡해진다는 이유로 중종이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세 번째 왕비로 문정왕후가 들어오게 된다. 남편인 중종이 사망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단경왕후가 거처하는 곳을 폐비궁이라고 부르고 생활 보조를 했고 1557년 (명종 12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단경왕후 능 : 온릉
이때 왕실에서는 장례를 왕후 시부모의 예를 따라 이등례로 초상을 치렀고 그 후 시호 없이 신비로 불리다가 영조 15년 1739년 김태남등의 건의로 왕후로 복위되면서 단경이라는 시호, 능호는 온릉을 받게 되었다. 단경왕후 사망후 182년만에 복위와 함께 능이 경기도 양주 온릉으로 재조성되었다. 단경왕후의 온릉은 그동안 군사시설 보호구역에 위치해 있어 개방되지 않았다가 최근에 개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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