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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을사사화 - 정미사화 (양재역 벽서사건 )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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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사화

문정왕후는 대윤파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에 돌입한다. 대윤파의 수장이었던 윤임을 제거한 것이다. 문정왕후는 윤원형에게 윤임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라고 했고 이때 정순붕이라는 인물이 대윤파의 수장인 윤임이 역모를 꾸몄다는 상소가 올라오게 된다. 정순붕은 윤원형과 뜻을 함께 했던 소윤파의 핵심 인물로 이 상소 덕분에 문정왕후는 윤임을 유배보내고 사약까지 내리며 윤임을 제거할수 있었던 것이다. 윤임과 함께 엮였던 대윤파 역시 대부분 사사된다. 

 

 

 

양재역 벽서사건 = 정미사화

을사사화 2년 후인 1547년 말죽거리 양재역에 괴문서가 붙게 되었다. 그 내용은 여주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달릴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라는 내용의 벽서였다.  문정왕후는 이 벽서에 분노하고 소윤파는 이것은 대윤파의 잔당이 꾸민짓이라고 고하면서 다시한번 살벌한 숙청이 시작된다. 대윤잔당 20여명을 가차없이 유배보내고 대윤과 조금이라고 관련이 있는 이들은 모조리 유배보내거나 사사한다. 이 사건을 양재역 벽서사건, 또는 정미사화라고 불렀다.

 

 

문정왕후는 을사사화를 시작으로 5년 넘게 대윤파를 숙청했고 대윤의 핵심은 물론 권력에 방해가 될만한 인물을 포함 무려 1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을 처벌했다. 당시 기록에는 많이 대신이 유배가거나 죽어서 조정이 텅 비었다는 기록이 남을 정도였다. 

 

 

을사사화 이후 거듭된 숙청으로 문정왕후는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문정왕후는 자신의 동생 윤원형을 말단 관리에서 정 2품 이조판서에 임명한다. 당시 이조판서는 관직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자리였다.  이후 윤원형은 문정왕후 세력으로 조정을 채우기 시작한다.

 

 

문정왕후의 불교부흥 정책

 

임꺽정 시대적 배경 된 문정왕후 불교중흥정책과 봉은사 이야기

중종의 세번째 비 문정왕후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렇게 수렴청정 5년 후 1550년 12월 문정왕후는 불교부흥을 추진한다. 문정왕후 불교중흥 정책 승과 제도, 도첩제 실시 남편 중종이 폐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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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이 20살이 되던데 문정왕후는 자신의 수렴청정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한다. 비로소 명종이 문정왕후 그늘에서 벗어나는듯 했다. 그러나 여전히 조정에는 문정왕후의 세력들로 가득했고 문정왕후는 윤원형을 통해 대신들에게 명령하고 원하는 게 있으면 명종을 직접 압박하기도 했다. 물러난 뒤에도 끊임없이 정사에 간섭한 문정왕후였다.

 

 

 

문정왕후 죽음

1565년 4월 65세 나이로 문정왕후는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 소원은 남편 중종 옆에 묻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종왕후는 중종옆에 묻히지 못했다. 중종이 묻힌 곳은 정릉으로 비가 오면 정릉 주위가 계속 물에 잠기는 곳이었다. 이에 아들 명종이 어머니 문정왕후를 묻을수 없다고 하여 지금의 태릉에 홀로 묻히게 된 것이다.

 

 

조선에서 전무후무하게 권력을 휘둘렀던 문정왕후는 실록상 부정적인 측명이 강조된 부분이 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권력을 남용했다는 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문정왕후는 태릉에 왜 홀로 묻혔나?

 

문정왕후는 태릉에 왜 홀로 묻혔나?

[역사저널 392회] 태릉의 상징 중 하나는 태릉선수촌 1966년 6월 국가대표선수의 강화 훈련을 위해 설립된 종합 선수합숙훈련장이 있고 태릉갈비도 유명하다. 또한 문정왕후 단릉인 태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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