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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벌거벗은 한국사

황희 정승 이야기 42회

황희는 조선 역사상 최장기 제상에 있었고 87세에 은퇴를 했다. 1363년 고려말 황희는 개경에서 태어났는데 어릴때 부터 영특해서 읽은 건 잊지 않는 총명함으로 남들과 달랐다. 황희가 처음 관직에 오를때는 고려 32대 왕 우왕(재위 1374~1388) 시기였다.

 

14세~ 30세

황희는 고려 , 조선시대에 공신 혹은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를 채용하던 음서제도에 의해 관직에 14세에 나갔다. 그리고 27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성균관 학관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3년 후 실직하게 된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개국 후 이성계(태조)가 다시 황희를 찾았고 황희의 능력과 인품을 높이 사 직접 조선 관리로 임명한다. 그렇게 황희는 고려 우왕 창왕 공양왕에 이어 조선의 새로운 왕 태조를 자신의 네 번째 왕으로 모시게 된다. 이후 황희는 30세에 성균관 학관으로 복직을 하고 조선의 왕세자를 가르치는 정7품 관리 세자 우정자로도 임명된다.

 

 

46세 첫번째 사임 요청

33세에는 정 6품 문하부 우습유로 왕의 옆에서 간언을 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소문대로 황희는 특출나게 일을 잘하는 신하였다. 황희가 39세때 태종 이방원이 왕이되고 1405년 황희의 나이 43세에 황희는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급인 지신사로 임명된다. 왕의 조력자이자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자리였다. 황희는 이 일을 잘해냈다. 그러나 황희 나이 46세에 관직을 임명하는 일에 황희가 관련되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황희는 첫번째 사직을 요청한다. 그러나 태종은 오히려 황희에게 반발했던 관리를 해임시켰다. 

 

 

황희 유배가다

태종은 황희에게 형조 판서 자리를 주었다 .지금의 법무부 장관이다. 이로써 황희는 54세 육조판서를 모두 역임하게 된다. 태종은 황희를 자신의 심복처럼 두고 국가 전반의 일을 두루 거치게 했다. 그러나 1416년 세자 양녕대군의 처분을 두고 태종과 정반대의 의견을 내면서 태종과 황희는 부딪치게 되고  태종은 황희를 남원으로 유배보내고 황희와 지위를 모두 빼앗고 평민으로 만들었다. 당시 황희의 나이는 56세였다.

 

황희의 유배지  -> 남원 광한루 역사 황희 정승이 지은 누각이었다. ! (1-1)

54세에 육조판서를 모두 역임한 황희

 

 

태종 승하 

황희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누구도 많나지 않고 유배 생활을 했고 그 동안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세종 즉위 후에도 황희는 여전히 유배생활 중이었다. 황희가 남원으로 유배당하고 4년이 흐른 1422년 황희는 세종의 부름을 받는다. 태종이 세종에게 황희를 추천했던 것이다. 황희가 중앙조정으로 돌아오고 3개월 뒤 태종은 세상을 떠난다. 이때 황희의 나이는 60세였다. 

 

 

 

황희의 7번째 왕 세종

60세의 나이로 자신의 7번째 왕 세종을 모시게 된 황희였다. 그리고 1년 후 61세가 된 황희를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하고 3년 동안이나 흉년이 지속되던 강원도를 살펴보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황희는 실태를 파악한  태종에게 알리고 이후 태종은 강원도 지역에 쌀을 보내 지원을 하니 강원도 백성들의 삶은 안정이 되엇다. 이후 1426년 황희는 우의정에 임명된다. 그리고 1년 후 좌의정으로 승진시킨다. 그러나 좌의정이 된 황희는 갑자기 살인사건에 연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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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서달 살인사건 은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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