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orean History

한국 전쟁 속 스미스 부대와 지게 부대 이야기

6월 27일 미군은 즉각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6월 29일 전황을 확인하기 위해 맥아더 장군은 전용기를 타고 한강 전선에 도착한다. 그리고 1950년 7월 1일 당시 일본에 주둔 중이던 미 제 24사단 34연대에서 선발한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를 편성하고 그들이 부산항에 도착한다. 

 

스미스 부대

 

스미스 부대 전력 

당시 일본에서는 어느 정도 완성된 체제 개혁으로 인해 일본에 있던 미군이 많이 철수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군 부대 인력뿐 아니라 장비나 무기도 부족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스미스 부대를 꾸릴때 전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고 스미스 부대의 전력 또한 2개 보병 중대, 4.2 인치 박격포 2대 소대, 무반동총 사수 1명, 6인치 바주카포 6개 팀 정도를 갖춘 후방의 작은 대대 정도의 전력이었다. 

 

그래서 스미스 부대는 한국전쟁에 와서 계속 폐한다. 또한 당시 북한군은 상당히 훈련이 잘된 군대였을 뿐만 아니라 중일 전쟁 당시 중국군으로 참전했던 조선인들이었다. 그래서 북한군에 예속된 실전 경험이 많은 최정예 부대가 약 4만 명 정도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전투력에서 상당한 차이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스미스 부대의 희생 

스미스 부대 첫 전투에서 전사 150 여명, 실종 26명되었다. 전투를 치러가며 맥아더는 북한군의 전력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악전고투하며 전투를 치른 스미스 부대였다. 

 

그렇게 스미스 부대가 계속 패배하고 있는 시점에 북한군의 진격 속도가 느려지고 그 사이 미군은 한반도로 계속 투입되고 있었다. 미 제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게 된다. 

 

 

 

지게부대의 활약 

6.25 전쟁 최후의 보루, 낙동강 방어 전선을 방어하는데  지게부대가 큰 역할을 했다. 총과 군장 대신 지팡이와 지게를 지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0% 이상이 산악 지역이라 보급의 어려움이 컸다. 노무단이 지게에 탄약이나 식량을 싣고 보급 활동을 했고 부상병도 후송했다. 당시 지게 부대가 45kg 씩 약 16 km 를 운반할수 있었다. 감히 가늠할수 없는 노고였다. 

 

 지대부대의 모습 

 

이 지게부대를 미군부대는 A프레임 아미라고 불렀다. 지게를 뒤에서 보면 A 모양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군인 유공자로서 인정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름도 없이 피땀을 흘려 희생한 이들이다. 

 

 

그 덕에 전쟁의 판도를 바꿀 인천상륙작전 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