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는 바다가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여수 밤바다.. ~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전투를 지휘했던 고소대는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고소대는 전라좌수영 성체를 보완해 만든 대포 발사대, 포루이다. 예전에는 고소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비각만 남아있다.
고소대 (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 )
수군대첩 비각 옆 타루비가 있다. 타루란 눈물을 흘린다는 뜻으로 1603년 이순신이 전사한지 6년 뒤 (선조 36) 에 이순신 휘하에 있던 좌수영의 군인들이 이순신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전라도 정읍 현감 이순신이 여기 여수에 있는 전라좌수영에 부임했다. 계급은 전라좌수사, 지금의 1함대 사령관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군정은 문란하고 군기는 엉망이었다. 이런때 이순신을 천거한 이가 징비록의 저자 유성룡이었다.
여수 선소 유적
이순신은 매일같이 관내 고을을 돌며 군사들의 훈련상황과 군 장비를 점검했다. 특히 수군의 생명인 선박건조에 심혈을 기울인다. 여수 선소 유적은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이 건조되었던 3개 선소지 중 하나로 추정된다.
1590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임진왜란 당시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20일만에 조선의 수도까지 함락시킨다. 일본군의 수륙병진 작전은 이순신의 수군에 의해 작전 실패로 돌아간다. 남해안을 장악한 이순신은 일본군 보급로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옥포해전: 1592년 5월 경남 거제시 옥포동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일본군 함대 40여척을 무찌른다. 임진왜란 해전 첫 승리였다.
* 사천해전: 5월 29일은 북상 중인 육군의 보급로를 확보하고자 서해안으로 진격한 일본 수군을 사천 앞바다에서 격퇴한다. 거북선을 이용해 승리한 최초의 전투였다.
1593년 이순신은 3면의 바다를 지휘하는 조선 최초 삼도 수군 통제사(충청, 전라, 경상도) 로 임명된다. 전쟁 중이던 1597년 2월 1일 해군 총사령관 이순신이 서울로 압송된다. 이유는 이순신이 왕명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왕명 불복종 사건 그 진실은?
백의종군로
이순신은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찢어지는 심정으로 백의종군하기위해 한양에서 도원수 권율이 있는 곳까지 총거리 640KM에 달하는 길을 석달 넘게 전라도를 지나 경상도로 걸어갔다.
1597년 7월 18일 이순신이 경남 합천을 지날때 비보가 전해진다. 원균이 이끌던 조선 해군이 전멸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칠천량 해전이다. 수군이 함락되자 일본군은 거침없이 진격한다. 사천, 진주가 함락되고 호남이 일본군 손에 들어갔다.
이순신은 경남 초계에 있었고 칠천량해전 패전 소식을 듣고 수군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길을 가던 8월 3일 선조에게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손경례 고택에서 재임명 교서를 받는다.
'Korean History > @ He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사 김정희 별장: 백석동천 폐허가 된 별서의 정취... (0) | 2024.06.23 |
---|---|
흥선대원군 별서 석파정 (0) | 2024.06.23 |
청와대 소정원 , 대통령 관저 (0) | 2024.02.13 |
Blue House 투어 : 청와대에 푸른 기와를 올린 이유 (0) | 2024.02.13 |
완도 고금도 묘당도 속 충무사 이순신 유해가 잠들었던 곳.. (0) | 2024.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