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썸네일형 리스트형 히잡혁명 강력한 원리주의 원칙을 강조하는 이슬람 국가 이란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변화의 시작은 오스트리아 빈이다. 2011년 빈에서 이란 관련 보고서가 작성되었는데 이란이 핵개발을 하고 있다는 보고서였다. 미국을 중심으로 서방 국가들은 이란에 핵개발을 포기하라고 경제 제재를 가했던 것이다. 이에 이란의 경제 상황은 위기를 맞게 된다. 이 일로 이란 국민 10명 중 1명은 의식주를 해결할수 없는 절대 빈곤 상태가 되어 버렸다. 히잡 혁명 이전 상황 이란 혁명의 주역인 호메이니 증손녀의 사진 한장이 이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바로 증손녀가 들고 있던 명품백때문이었다. 논란이 되자 진품이 아니라고 변명을 했다. 또한 고위직에 있던 아버지를 둔 인물이 반려동물로 맹수를 키우는 사진을 올리면서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더보기 조선 최초 전차 개통 이유 1899년 5월 조선 최초로 전차가 개통이 된다. 전차를 개통한 이유가 청량리 홍릉 때문이었다. 고종이 능행을 많이 다니기 때문에 잦은 능행으로 비용 절감을 위해 건의된 전차가 개통이 된 것이다. 그래서 첫 노선 운행로는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 홍릉까지 연결되도록 많들어졌다. 그런데 정작 고종은 전차를 이용하지 않았다. 전차를 보니 상여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이용을 꺼려했다는 설이 있다. 더보기 명성황후 장례식 (유해 수습은 누가? 장례식에서 무슨일이? ) 1895년 10월 8일 조선의 국모였던 명성황후는 일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다. [이전글]을미사변 명성황후 장례 전 명성황후 남은 유해는 어떻게 했을까? 당시 조선군 훈련대 참위였던 윤석우가 불에 탄 시신을 목격했으나 누구의 시신인지 알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이에 조선군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이 타고 남은 시신을 연못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윤석우는 왕비의 시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몰래 시신을 수습한다. 온전치 못한 하반신만 겨우 수습한 후 오운각 서쪽 산 아래에 매장했다가 명성황후 사망 발표 후 겨우 빈전( 관을 모시는 전각)으로 모셔진 유해이다. 명성황후 유해 수습에 대한 기록은 매천야록( 선비 황현이 기록한 조선 말기 비사)에 조금 남아있다. 유골과 재가 섞여 있었고 장례에 익숙한 환관을 불러.. 더보기 창덕궁을 만든 이유는?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다. 그래서 왕이 가장 오래 머물러 있는 궁을 생각하면 경복궁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으나 실제로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이다. 궁궐의 역사를 보면 경복궁은 약 225 년이고, 창덕궁은 약 500년 이고 창경궁은 약 420년 정도이다. 조선 전기에도 경복궁이 있었으나 왕이 다른 궁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조선 전기에도 양궐 체제로 법궁과 이궁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었다.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이용했던 이유 1394년 태조 이성계는 한양 천도후 경복궁을 조성했다. 조선의 3대 왕 태종 5년 창덕궁 창건을 명했다. 조선 후기 왕들도 임진왜란 이후 소실된 경복궁을 재건하지 않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원하고 경희궁을 신축했다. 그 이유는 2대 왕 정종이 t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천도했다... 더보기 을미사변 역사저널 393회 을미사변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한 나라의 국모가 일본인에게 무참히 살해된 사건이다. 1895년 주상전하-> 대군주 폐하, 왕비전하-> 왕후 폐하로 변경 , 1897년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 선포되면서 왕후에서 황후로 지위 상승했다. 이에 명성황후를 민비로 부르는 것은 격을 낮춰 부르는 호칭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명성황후를 많이 사용하는 추세이다. *시해는 부모나 임금 등 윗사람을 죽일 때 쓰는 말이고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살해로 써야 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내용은 각국 외교관의 보고서 회고록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일본인들이 건천궁 곤녕합에서 명성황후를 발견하고 밖으로 끌어내 무자비하게 살해한 것은 틀림없는 .. 더보기 고종 장례식 (인산일) 모습, 의미 조선의 마지막 황제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를 당하여 1919년 1월 20일 68세로 생을 마감한다. 고종황제의 장례는 패망 군주의 장례식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본 귀족의 장례 절차에 준하여 고종의 장례는 치러진다. 특히 일본식 국장을 기본으로 하고 조선식 예법이 가미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산릉을 조성하는데만 1만 여명 이상의 인력과 엄청난 물자가 동원되는 것이 국상이다. 왕의 첫 번째 임무가 국상인데 조선시대 오례에 관한 의식절차를 기록한 책 국조오례의를 보면 국왕이 승하하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5개월이 소요된다. 그 후 삼년상 약 60가지 절차를 거쳐야 한다. 동빙고에 저장된 얼음으로 시신을 보존했고 대나무 평상에 시신을 안치하고 얼음을 갈아주면서 시신을 오랬동안 보존했다. 조선의 국장 행.. 더보기 힙합 레전드 투팍 사망 사건 [이전글] 힙합의 역사 ( HIPHOP History) 1970년대에 이르러 재즈와 더불어 또 하나의 새로운 음악이 나타나면서 전세계가 열광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힙합이다. 힙합 HIPHOP 탄생지 힙합의 탄생지는 뉴욕으로 뉴욕의 5개 자치구들 중 가 jangane.tistory.com 힙합 전쟁으로 힙합 부흥기를 맞게 된 90년대 중반. 전 세계를 깜짝놀라게 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90년대 살아있는 힙합 레전드로 불린 투팍이 총격사건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투팍 사망의 원인은 디스전 때문이었다. 투팍 사망 사건 배경 그런데 왜 디스전이 세계적인 래퍼의 목숨까지도 앗아갔을까? 90년대 동.서부 힙합신의 긴장을 고조시킨 한 사건이 있었다. 1991년 뉴욕 출신 래퍼 ‘팀 독’ 이 서부 .. 더보기 하멜 표류기 이야기 38회 하멜 표류기는 유럽에서 조선을 본격적으로 알린 최초의 책으로 네덜란드인 하멜이 낯선 조선 땅에서 보낸 약 13 년간의 표류 생활이다. 17세기 조선 제주도를 그린 이 그림은 외국에서 쓴 헨드릭 하멜이 쓴 하멜 표류기에 있는 그림이다. 하멜일행 제주도 표류 1653년 8월 23살 하멜을 포함 총 64명의 네덜란드 선원들은 바다를 항해하던 중 태풍에 휩쓸려 암초에 부딪혀 배가 산산이 부서졌다. 얼마 후 살아남은 하멜은 조선의 제주도에 표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하멜은 자신의 동료를 찾았고 64명 중 36명만 살아남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얼마뒤 멀리서 말총을 짠 모자를 쓴 조선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들도 하멜을 보고 그냥 돌아가버렸다. 그리고 표류 3일차 되던 날 1~2천여 명의 군사들이 들이닥쳐 .. 더보기 이전 1 ··· 51 52 53 54 55 56 57 ··· 6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