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썸네일형 리스트형 이완용 어떻게 친미파 -> 매국노 친일파가 되었나? 덕수궁의 일부였던 중명전(밝은 빛이 이어진다는 뜻)은 황실 도서관이었다. 광명이 계속 비추어야 할 이곳에서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1905년 11월 17일 저녁 일본헌병이 덕수궁 중명전에 들이닥친다. 퇴궐준비를 하던 대한제국의 대신들은 겁에 질려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일본 헌병은 대신들을 회의실에 밀어놓고 감금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포기하는 조약에 찬성하라고 강요했던 것이다. 중명전은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간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이다. 이때 을사늑약에 적극 찬성했던 단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완용이다. 이완용 일본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완용은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였다. 그는 처음에 일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었다. 이완용 어떻게 친미.. 더보기 미켈란젤로 피에타 조각상, 다비드상 이야기 르네상스 미술을 이끈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라는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는 완전히 상반된 인물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유하지 않은 성격에 주변 사람들과 다툼이 잦았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 미켈란젤로가 태어난 곳은 이탈리아의 카프레세라는 작은 마을인데 미켈란젤로가 유명해지면서 마을 이름을 로 변경했다. 미켈란젤로의 어린 시절 어릴때 부터 미술 공부의 기회가 있었던 미켈란젤로였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일찍 알아보고 미켈란젤로는 13살의 나이에 피렌체 공방에 가게 된다. 그곳에서 약 1년을 보낸 후 미켈란젤로의 인생을 뒤바꾼 로렌초 데 메디치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로렌초는 막대한 자금을 들여서 예술가를 후원하고 있었다. 이때 로렌초의 눈에 띈것이 미켈란젤로였고 메디치 가문의 소장품들을 보며.. 더보기 레오나르도 VS 미켈란젤로 (앙기아리 전투 : 카시나 전투) 레오나르도 VS 미켈란젤로 1503년 정부는 피렌체에 있는 레오나르도에게 앙기아리 전투 벽화를 의뢰하게 된다. 그런데 다비스상이 이듬해에 완성이 되면서 미켈란젤로에게 레오나르도가 그리는 벽화 그림 맞은편에 벽화그림을 의뢰한 것이다. 이렇게 세기의 대결이 펼쳐진다. 1504년 당시 52세 레오나르도와 29세 미켈란젤로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그림은 1364년 7월 28일 카시나 전투였다. 피사를 상대로 피렌체군이 크게 승리한 전투이다. 미켈란젤로가 임금 차이로 분노했다는 설이 있다. 레오나르도가 벽화를 그리는 대가로 받은 금액은 10,000 플로린이였는데 피렌체 공무원의 100년 치 임금이었다. 반면에 다비드상을 제작했을 당시 미켈란젤로의 임금은 400 플로린이었다. 그래서 벽화 임금이 더.. 더보기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무엇이 특별한가? 로마로 향했던 미켈란젤로는 당시 율리오 2세 교황으로 부터 시스티나 성당의 대형 천장화 작업을 의뢰받게 된다. 천정화는 어려운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었고 미켈란젤로는 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 거절을 했다. 그러나 교황의 끈질긴 설득으로 결국 작업을 승낙했다. 미켈란젤로의 작업은 더디었고 또한 작업한 내용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이에 교황은 불만이 쌓여갔고 미켈란젤로 역시 교황의 입금이 늦어지는 것에 화가 나있었고 두 사람의 불만은 커져갔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갈등 속에서도 자신의 그림을 게을리 하지 않고 결국 4년만에 천장화를 완성한다. 천지창조 무려 아파트 4층 높이의 천장화로 벽화 중앙에는 창세기를 담은 9개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을 발판을 짚고 올라서서 고개만 뒤로 젓혀서.. 더보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유명한 이유 (스푸마토 기법이란? ) 레오나르도는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그가 남긴 많지 않은 그림 중 현재까지도 모자리자가 가장 가치있는 초상화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그렇다면 모나리자가 수백년간 명작으로 불린 이유는 무엇일까? 모나리자 속 미술 기법 그 이유는 르네상스 시대 모든 회화 기법이 모나리자 하나에 모두 압축이 되어 있다. 첫째로 유화 물감을 사용했고 뚜렷하지 않은 외각선을 사용해 사실적인 표현력을 높인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했다. 눈매와 입술 끝자락 부분을 갈수록 어둡게 표현하는 명암의 활용 또한 배경을 등지고 주인공의 좌우가 대칭되어 보인다. 피라미드 구도를 사용해 초상화를 안정감 있게 표현한 점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그림으로 꼽히는 이유라고 할수 있다. 레오나르도가 이렇게 뛰어나고 섬세한 그림을 그릴 수.. 더보기 장희빈은 어떻게 중전이 되었나? (20회) 1686년 조선의 19대 왕 숙종은 장희빈에게 빠져 국정을 소홀이하고 있다는 상소에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숙종과 장희빈의 문제가 국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장희빈은 누구? 을 통해 알려진 장희빈의 실제이름은 장옥정이다. 희빈은 빈=은 서열1위의 후궁이라는 뜻이다. 많은 드라마에 등장하면서 장희빈이라는 이름이 친숙해진 것이다. . 장희빈은 역관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당시 역관의 신분은 중인으로 재력있는 중인의 신분으로 잘살고 있었으나 아버지가 갑자기 죽고 어머니가 장희빈을 궁녀로 들여보냈다. 그래서 장희빈은 궁녀의 생활을 시작했다. 장희빈은 실록에 궁궐 여인의 미모가 언급된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그리고 숙종은 인경왕후 (첫번째 아내)가 전염병으로 죽고 힘든 날을 보내고 있던 시.. 더보기 1597년 난중일기 : 통절한 심정이 담긴 이순신의 기록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은 의금부로 압송된다. 당시 조선수군총사령관 이순신이 압송되는 모습을 보며 백성들은 통곡을 했다. 이순신은 왜 의금부로 압송이 되었을까? 1592년 4월 13일 부산앞바다에 기습적으로 처들어온 일본군에 의해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불과 20일 만에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온 나라가 일본군에게 짓밟혔다. 그러나 조선의 바다는 달랐다. 해상에서는 이순신의 일방적인 승리로 일본 수군의 길목을 막고있었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수세에 몰렸던 조선이 한숨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해로 일본의 정예부대를 급하게 파견하게 된다. 1592년 7월 8일 한산대첩 한반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벌인 전투인데 한산대첩 하루 전날 견내량이라는 곳에 외군의 배가 모여.. 더보기 연개소문과 연남생 고구려 멸망시키다. 21회 7세기 요동을 차지한 나라는 고구려로 당 태종은 유언으로 요동에 가는 것을 금지했다. 그것은 자신이 추진하던 고구려 정벌을 멈추라는 유언이었다.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에서 실패했고 그때 장수가 바로 연개소문이다. 연개소문은 누구? 연개소문은 고구려 최고 관리 대대로(고구려 국정을 관리하는 최고 관등) , 막리지(국사를 총괄한 관직) 를 역임했던 집안으로 고구려 최고 가문의 촉망받는 후계자였다. 당시 가문은 아버지의 관직을 아들이 이어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고구려의 다른 귀족들은 연개소문의 세습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연개소문의 성격이 포악하다는 이유였으나 사실 연개소문의 집안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연개소문 쿠데타 그래서 연개소문은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그들에게 사과를 한후 관직에.. 더보기 이전 1 ··· 53 54 55 56 57 58 59 ··· 6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