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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영웅 강우규 의사 : 서울역 앞 동상 그는 무엇을 했나? 강우규 의사는 누구? 의열투쟁의 대표적 인물로 안중근을 떠올린다. 의거 당시 안중근의 나이는 31세였다. 일왕의 생일축하연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의 당시 나이도 24세였다.  그러나 적지않은 나이 65세의 나이로 의열투쟁을 했던 인물이 있다. 강우규 의사이다.    친일파 양성 사이토 마코토 1910년 한일합병이후 일순간 나라를 잃은 삼천만 조선민중은 비탄에 잠기게 되고 1919년 3.1운동이 평화적으로 전개되지만 일본은 무자비하게 총칼로 민중을 탄압했다. 이후 일본은 문화통치로 식민정책을 바꾼다. 1920년대 이 문화통치를 통해 수많은 친일파가 양성되었다. 그 시발점을 만든 인물이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었다. 그는 폭력이 아닌 교묘히 민족분열을 조장해 조선 민족을 분열시키려 했던 인물이다.   강우규 의.. 더보기
사후 세계 믿음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무덤이다. 죽은 사람의 집이 무덤이고 그 무덤 속에 무언가를 함께 묻는 것 자체가 사후 세계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000년 전 청동기 시대 대표적인 무기 청동으로 만든 비파형 동검 칼이 있다. 무덤을 파보면 동검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칼의 상태가 하나의 온전한 상태의 칼로 나오는 것이 아닌 칼이 반토막으로 부러진 상태로 발견된다.   이것은 일부러 부러트린 형태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칼을 반 토막을 내서 묻었을까를 생각해보면 기록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알수 없으나 한가지 추측으로는 동검의 주인이 죽으면 저승에서도 칼을 들고 활약하기 위해 칼도 저승으로 보내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칼을 부러뜨려 넣.. 더보기
영화 암살 전지현 모티브 인물 : 남자현을 아시나요? 남자현이 독립운동을 한 계기남자현은 경상북도 영양에서 지내온 인물로 을미사변 당시 남자현의 남편은 의병 활동을 하던 중 전투 중 사망하게 된다. 그 당시 임신 중이였는데 남편의 마지막 옷을 품고 다녔다고 한다. 남자현은 아들을 다 키우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봉양한 후 남편의 복수를 위해 47세의 나이에 아들과 함께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했고 1919년 만주로 망명 후 독립군 부대 서로군정서에 들어갔고 서로군정서의 신흥무관학교에 아들은 입학을 했다. 이렇게 남자현은 오랜기간 준비를 했고  실제 남자현은 총을 잘 쐇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흥무관학교 1910년 한일합병 이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와 러시아로 이주하게 되고 그곳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관을 세우게 되는데 대표적인 .. 더보기
동의회 엄인섭 독립투사에서 밀정으로.. (15만원 탈취 의거 ) 엄인섭은 누구? 엄인섭은 동의회 소속 독립 운동가였다. 안중근 의사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항일 투쟁의 선봉장에 섰던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였기 때문에 엄인섭의 실체를 최근까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의 기밀자료가 공개되면서 엄인섭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1911년 부터 엄인섭이 정보를 보고했다는 기록이 발견된 것이다.   15만원 탈취 의거 엄인섭이 밀정으로 드러난 결정적인 사건은 간도 15만 원 사건이 있다. 독립자금을 구하기 위해 함경북도 회령에서 일제가 15만원(현재가치 약 150억원)을 운송 중이었고 이것을 탈취해 독립군 문기를 구입하려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이 드러나 탈취와 동시에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된다. 이때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등이 체포가 되서 서대.. 더보기
이름없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동의회, 권업회 만들다. 이름없는 독립운동가들이 많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시베리아 항일 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최재형이다. 최재형은 재력가이면서 베푸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나 사실  최재형은 아버지는 노비 어머니는 기생인 노비 출신이다. 1860년대 함경북도를 덮친 흉년때 가난과 학정을 피해 수많은 한인들이 러시아로 도망을 갔다. 1869년에만 약 6000명의 조선인이 연해주로 이주했고 이에 러시아 정부는 토지를 제공, 세금 면제 등 포용 정책을 펼쳤다. 이때 러시아 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한국인 학생이 최재형이었다.    \러시아 학교에서 러시아어를 익힌 최재형은 이후 배를 타며 선원 생활을 했고 생활기반을 다졌다. 최재형은 러시아 주요 도시에서 생활을 하며 통역과 군수사업으로 단기간에 부를 축적하며 출세의 기반을 다졌다. .. 더보기
싱가포르 어떻게 독립국가가 되었나? (싱가포르 국기 의미/건국 아버지 리콴유 ) 161-3 [이전글] 건국 아버지 리콴유 1959년 영국은 싱가포르의 요구에 따라 자치 정부를 수립한다.  1959년 6월 싱가포르는 의원내각제 기반의 최초의 보통 선거를 실시했고 이 선거에서 훗날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 초대 총리 리콴유가 당선된다.  리콴유는 화교 4세 출신으로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한 인민행동당을 만들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가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식민시절에 모여들었던 다인종간의 화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싱가포르를 교역 중심에서 산업 사회로의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공약한다. 이 공약으로 리콴유는 싱가포르 집권 여당 및 싱가포르 초대 총리로 당선된 것이다.  말레이시아 연방 수립의 문제점 그러나 이후 바로 냉전시기로 접어들면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하자 당시.. 더보기
싱가포르 식민지 시기 역사 (영국 식민기->일본 식민지 ) 161-2 [이전글] 영국 식민기싱가포르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후 영국은 싱가포르 개척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1822년 가장 먼저 한 일은 척박한 땅을 개간한 것이다. 강 남쪽의 습지와 늪지대를 평평하게 만들고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상업 지구로 개발한다. 또한 1868년 제일 중요한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싱가포르 섬 한가운데 최초의 저수지 맥리치 저수지를 건설한다.   초기에는 작은 저주지였으나 현재는 약 6배 규모로 개발 자연공원으로 이용 중이다. 이 저수지는 싱가포르의 식수 공급과 선박들의 용수 공급처로 활용되었다. 또한 해적과 외부침략을 막기 위해 군사시설을 만들었다. 이후 이곳은 영국 식민정부의 중요한 지휘 본부가 된다.    군사 기지가 완성 된 후 영국은 해적 소탕을 시작한다. 영국의 .. 더보기
싱가포르 역사 (어떻게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나?) 싱가포르는 서울보다 조금 더 큰 면적의 나라이지만 2023년 1인당 GDP 88.450 달러로 아시아 1위,  세계 5위의 경제 부국으로 뽑히는 나라이다. 또한 외국인이 살기 좋은 나라 5년 연속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싱가포르는 인구 약 600만 명의 작은 나라로 구글, 아마존, 애플 등 약 5천개 이상의 다국적 기업과 세계적인 금융사가 다수 진출해 있고 석유화학, 전자 등도 첨단 제품 수출을 기반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불과 200여 년 전만 해도 해안가를 뒤덮은 두개골과 수천 마리 쥐가 들끓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사람이 살기 어려운 죽음의 섬이었다. 땅의 대부분이 늪지대와 정글뿐이었고 마실 물조차 굉장히 부족했다.   싱가푸라 왕국1299년 싱가포르는 싱가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