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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y

사도세자는 왜 뒤주에 갇혀 죽었나? (12회) 1762년 초여름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하라고 명한다. 그리고 뒤주가 들어온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뒤주로 들어가라고 명하고 사도세자는 8일 후 뒤주 안에서 주검이 되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500여년 조선왕조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사도의 탄생 사도세자의 탄생은 영조 인생에 큰 기쁨이었다. 그 이유는 영조가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한 아들이였기 때문이다. 당시 영조의 나이는 42세였고 조선왕의 평균 수명이 47세 인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늦은 나이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사도세자가 귀한 이유가 있었다. 영조는 25 살에 효장세자를 얻었으나 효장세자 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첫 아들은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첫 아들을 잃고 7년 만에 기다리던 아들 사도가 태어났던 것이다. 영조는 아들이 .. 더보기
다누리 우리나라 첫 달 궤도선 발사 성공 !! (왜 미국에서 발사? 달 탐사 이유는? ) 2022년 8월 5일 오전 8월 8분에 발사된 우리나라의 달 탐사선 다누리(달과 누리다 뜻)는 미국 플로리다 한국항공우주센터에서 발사가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달 궤도선 다누리이다. 달 탐사선 발사 계획은 2031년이다. 다누리가 발사에 성공하면 세계에서 7번째(미국, 소련, 인도, 중국, 일본, 유럽연합) 달 탐사국이 된다. 현재 첫 번째 교신까지 성공했다. 발사 이후 4개월 반 동안 달까지 날아가서 1년 정도 달 주위를 돌며 임무 수행을 한 후 연료가 고갈되면 달 중력에 이끌려 달에 추락할 것이다. 지구~달까지 직선거리는 약 38만 km 이다. 인류 최초의 아폴로 11호는 4일 만에 달에 착륙했는데 다누리는 설계변경으로 무게가 늘어나 비행궤적을 변경하면서 나비 형태로 600만 km를 빙빙 돌아가기 .. 더보기
조선시대 환관 이야기, 박한종 (청도 운림고택) 조선 시대 환관 조선시대 환관은 왕의 측근으로 엄청난 부와 권력을 누리던 직책이었으나 환관이 되려면 엄청난 고통이 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민에서 양반까지 환관을 꿈꿨다.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환관으로는 박한종, 임우등이 있다. 환관의 뜻 벼슬 환, 벼슬 관 으로 벼슬하는 관리라는 뜻 외에도 남성성을 상실했다는 뜻이 있다. 조선환관에는 내시라는 이름도 있었다. 고려시대 환관과 내시는 다른 신분이었으나 조선 시대는 내시=환관이 같은 말이 되었다. 환관은 궁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 궁녀들이 하기 힘든 일을 하기도 하고 왕실 사람들은 시중을 들거나 때론 왕과 신하 사이에서 나랏일을 돕기도 했다. 환관이 필요했던 이유는? 왕의 여자들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궁궐에는 많은 후궁들이 있었고 후궁 이외에도 왕의 여.. 더보기
임진왜란 때 끌려간 이삼평 일본 도자기 신 되다. (이도다완 일본 국보)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때 조선인 사기장이 많이 끌려갔고 그중에 이삼평이 있다. 그는 일본에서 도자기의 조상이 된다.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 1597년 정유재란까지 통틀어서 임진왜란이라고 칭한다. 1592년 4월 30일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왕은 수도를 버리고 도망을 갔고 90여 척의 배로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단 17일 만에 지방의 성을 함락시키고 한양 앞까지 쳐들어 왔던 것이다. 선조는 평양성에서 조선의 국경인 의주까지 쫓겨갔고 결국 명나라에 군대를 요청하기에 이른다. 임진왜란은 무려 7년 동안 이어졌다. 임진왜란 조선+명나라 연합군에 밀려 일본은 경남 해안까지 밀려났고 그곳에서 성을 짓고 버티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명나라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고 전쟁을 끝내고 떠나.. 더보기
의자왕은 왜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되었나? (9)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왕이다. 의자왕은 삼천궁녀, 안시성 기벌포, 황산벌 전투 등 영화의 소재가 되었지만 사실 그는 처음부터 방탕하고 무능한 왕은 아니었다. 그는 왜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되었는지 알아본다. 의자왕은 누구? 의자왕 뜻은 옳을 의 , 사랑 자, 로 의롭고 자비로운 왕이라는 뜻이다. 7세기 중반 삼국시대 모습으로 백제가 특히 경계하던 나라는 신라였다. 의자왕은 왕으로 즉위하고 이듬해 632년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섰고 의자왕이 지휘한 첫 전투에서 40여 개의 신라성을 함락시키며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재위하자마자 신라를 벌벌 떨게 했던 의자왕이었다. 왜 백제는 신라만을 열심히 공격했던 것일까? 지리적인 이유도 있었으나 백제 의자왕 가문의 복수심 때문이었다. 무려 4대조부터 이.. 더보기
세종 ! 며느리 4번 이혼 시키다. 이유는? (8회) 세종의 적장자 왕 문종을 두번이나 이혼시키고 자신의 두 아들 또한 이혼시켰는데 조선 시대 최고의 성군 세종도 가족일 만큼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세종의 적장자 문종 조선은 건국 이후 적장자에 의한 왕위 세습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1~4대 세종까지 아무도 적장자가 없었기 때문에 세종의 아들 문종의 결혼은 조선의 적장자 왕위 계승의 첫번째 사례였기 때문에 세종에게 특별했다. 유교 종법상 정통성 있는 왕위 계승의 기회로 정말 상징적이고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지 2년만에 사망한 문종이었다. 1. 세종의 첫 번째 며느리 퇴출 문종은 문무를 두루 겸비한 왕으로 즉위 전에 세종 곁에서 정치 경험을 쌓고 있었다. 세종은 무려 3년이나 며느리감을 고르고 또 골랐다. 심사숙고 끝에 세자빈을 고른 .. 더보기
강릉 무장 공비 잠수함 타고 온 26명은 어떻게 되었나? 1996년 9월 18일 강원도 강릉, 택시기사 이씨는 손님을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한참을 가는데 고속도로 갓길에 두남자가 있다. 고속도로에는 사람이 걸어다니지 않는데 두명의 군복입은 남자가 있다. 뭔가 수상함을 느낀 택시기사는 손님을 내려드리고 다시 남자들이 발견되었던 인근도로로 가서 내려서 살펴봤다. 강릉 무장 공비 침투 사건 강릉 잠수함 발견 그런데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났고 빨간 불빛과 검은 연기가 나는 해변으로 갔다. 그것은 잠수함이었다. 그래서 택시기사는 곧바로 신고를 했다. 진도개 하나가 발령되었고 잠수함은 북한잠수함이었다. 곧바로 UDT 대원들(=해군 특수부대)이 투입되었다. 잠수함 내부 해안에서 잠수함까지는 20m 거리였고 잠수함으로 들어간 대원은 본격적으로 내부 수색을 했다. .. 더보기
고종의 아관파천 이유, 민영환 조선사절단, 충정로 유래 (7회) 아관파천 1896년 2월 11일 새벽 조선의 26대 왕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단행했다. 두 대의 가마로 경복궁을 빠져나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던 것이다. 현재 러시아 공사관은 전쟁으로 파괴된 후 첨탑만 남아 있는 곳이다. 고종은 경복궁 탈출 시 일본군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 여장을 하고 여자들이 타는 가마를 타고 경복궁을 빠져나갔다. 이 사건을 아관파천이라 부른다. 당시 러시아를 아라사라고 불렀고 러시아 공사관을 '아관' 이라고 해서 아관 파천(왕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산하는 일) 이다. 고종과 왕세자가 일본군의 위협을 피해 1년 넘게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간 사건이다. 고종의 아관파천 이유 아관파천은 1896년의 일이다. 아관파천 2년 전인 1894년-1895년 조선에서 청일 전쟁이 일어.. 더보기
성균관 이야기 (5회) 천원짜리 지폐속 인물 퇴계 이황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정치가 300명이 넘는 유학자를 길러낸 교육자이다. 퇴계 이황 얼굴 뒷쪽 건물은 조선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이자 업무를 봤던 건물이고 공부를 했던 곳인 성균관이다. 성균관은 엘리트 관료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자 성현의 위퍠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의례의 장소이다. 천원 지폐권 속의 건물은 성균관 안에 있는 강의실이라고 할 수 있는 명륜당이다. 성균관의 뜻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하는 기관이라는 뜻이다. 성균관의 기능 성균관에서는 공자의 사상인 유학을 배웠다. 공자는 (기원전 551~479) 세계 4대 성인이자 유교의 창시자로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성품으로 인과 예를 강조했다. 그래서 유교의 핵심은 인(사랑).. 더보기
무신정변 원인 : 정중부의 난 (6회) 무신정변 1170년 고려 시대를 두 시기로 나누는 분기점은 무신정변이 있던 1170년이다. 무신들은 대체 왜 정변을 일으켰을까? 당시 고려에서 무신의 위치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고려시대 처음 생긴 개념 양반은 문반과 무반을 합친 말로 고려 초에는 문, 무반을 구분하지는 않았다. 나라가 커지면서 나라의 정치를 맡게 된 문신과 군대를 이끌 무신의 분업의 필요성을 느낀 고려는 이를 구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신과 무신이 올라갈 수 있는 벼슬에 차이를 두었다. 최상위 등급인 1품과 2품에 오를 수 있는 것은 대부분 문신이었다. 재추회의 (고려 최고권력기구) 문신만 가능했던 벼슬 중에 재추가 있다. 고려시대 왕을 제외한 제일 높은 직책으로 왕과 함께 국가 중요 사안을 논의하고 돕는 역할을 했던 직책이었고 재추회.. 더보기